희생된 엄주선 강도사의 삶 새기며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길 걸어
WCC 파동 속 바른 신앙노선 견지
천막교회 시절의 역경도 이겨내

순교자의 불굴신앙 70년 세월 지났어도 여전히 건재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의 화목제일교회(김영재 목사·경중노회)에선 슬픈 이야기 하나가 두고두고 전해진다. 그것은 1951년 2월 17일의 일이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엄주선 강도사는 홀로 예배당에 남아 기도하던 중,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인근 산악지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인민군들이 마을을 습격하며 총격을 해댄 것이었다. 놀랄 사이도 없었다. 교회 안으로 침입해 온 이들이 엄 강도사를 붙잡아, 자신들의 본거지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청송 화목제일교회는 순교자의 희생 위에서 의연하게 자라온 신앙공동체이다.
청송 화목제일교회는 순교자의 희생 위에서 의연하게 자라온 신앙공동체이다.

엄 강도사는 이웃한 의성군 다인면 봉정동 출신이다. 1919년 태어나, 16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예천 상락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일제의 수탈에 견디다 못해 아버지와 함께 만주 봉천으로 이주해 지내다, 해방이 되자 귀국해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한 후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청송 화목교회에서 시무하며, 목사안수를 기다리던 중에 엄 강도사는 뜻밖의 변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가 붙잡혀간 의성군 춘산면 일대는 얼음계곡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여름에도 냉기가 도는 곳이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에다 추위까지 절정에 달한 무렵이었지만, 엄 강도사는 자신의 외투를 함께 붙잡혀간 신중건 씨에게 벗어 입혀주는 따뜻함을 보여주었다.

6·25당시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를 기리는 테마공원.
6·25당시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를 기리는 테마공원.

그런 인물을 변절시키는 것은 인민군 입장에서 좋은 선전거리가 될 법했다. “신앙만 버리면 즉시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여러 차례의 회유가 있었다. 하지만 엄 강도사는 끝내 배교의 길을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군경 합동작전으로 인민군이 패퇴한 후, 사람들은 춘산면 바랑골에서 학살된 수많은 양민들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엄주선 강도사의 시신도 있었다. 33세 젊은 순교자를 위해 경북노회는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화목제일교회 신성길 서재봉 원로장로는 “현장을 목격하신 분들로부터 강도사님의 몸 수십 군데에 총검에 찔린 상처자국이 있었다는 말씀을 들었다”면서 “순교하실 무렵은 갓난아기 딸이 태어났던 때여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증언한다.

엄주선 강도사와 아내 최동욱 사모의 합장묘.
엄주선 강도사와 아내 최동욱 사모의 합장묘.

이 마을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4년 11월 23일의 일이다. 황재술 김상갑 씨가 주도해 덕계동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앙공동체가 시작됐다. 그 후 의성 실업교회의 강원백 조치일 영수 등이 합류하며 예배당을 건축했지만, 화재로 건물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구산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교회 이름도 구산동교회로 바뀌었다.

해방 후에는 지역 이름을 따 화목교회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엄주선 강도사의 부임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나 핍박과 순교로 인해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하지만 재앙인 줄만 알았던 이 사건은 두고두고 교우들의 긍지를 높여주는 계기가 됐다.

화목제일교회가 지나온 세월을 담은 역사집 [기억하라] 표지.
화목제일교회가 지나온 세월을 담은 역사집 [기억하라] 표지.

화목제일교회가 등장한 데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이 총회의 분열의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에큐메니컬운동을 반대하던 여러 성도들이 1960년 4월 17일 화목교회에서 나와 천막을 치며 예배를 시작했고, 이 모임이 차츰 자라 정식 교회로 성장했다.

이후 김두환 전도사를 시작으로 여러 교역자들이 화목제일교회 강단을 이어 지키면서, 화목제일교회는 차츰 성장의 궤도에 올랐다. 그 중에는 나중에 제94회 총회장을 지낸 서정배 목사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2000년에 부임한 신문종 목사의 경우는 18년 넘게 장기목회를 하며 교회의 안정기를 이끌었다.

역대 교역자들과 수많은 성도들의 헌신 속에서 기도운동 선교운동 전도운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열매들이 나타났다. 천막예배당은 초가예배당과 벽돌예배당 시절을 거쳐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왔다. 또한 최용주 목사가 시무하던 당시 전도표어로 제정한 ‘나도 한 사람, 당신도 한 사람’이라는 구호는 지금까지도 새 생명을 얻고자하는 화목제일교회의 뜨거운 열정을 유효하게 담아낸다.

특히 주일학교의 경우는 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예배당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부흥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 현 총회 서기 김한욱 목사 등 여러 목회자들과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신요한 선교사 등 신실한 복음사역자들도 배출됐다.

천막교회 시절의 화목제일교회 성도들.
천막교회 시절의 화목제일교회 성도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죽음 앞에서도 신앙고백을 굳건히 지켰던 엄주선 강도사의 의지나, 수용할 수 없는 신학에는 과감히 거부의 뜻을 표할 줄 알았던 성도들의 기개는 여전히 살아있다.

지금도 많은 힘이 필요한 일에는 모두가 과감히 팔 걷어붙여 헌신하고, 교회 안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할 때는 당회원들이 책임을 지고 근신기간을 갖는 등의 모습으로 교회를 흔들림 없는 반석 위에 세워 놓으려 하는 신앙문화가 자리잡혀있다.

이 같은 스토리들은 2년 전 신성길 장로가 편찬위원장을 맡아 발간한 화목제일교회 역사집 <기억하라>에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지난해에는 총회에 엄주선 강도사의 순교사적을 바탕으로 화목제일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해 달라는 청원도 올리며,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념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김영재 목사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교회를 보지 못할 뻔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감사하는 마음”이라면서 온 성도들과 함께 앞으로도 변함없는 신앙의 정진을 다짐했다.

경로대학과 무료급식을 통해 지역 주민들을 섬기는 모습.
경로대학과 무료급식을 통해 지역 주민들을 섬기는 모습.

“역사는 우리들에게 긍지를 일으킵니다”

화목제일교회 김영재 목사

산골마을 어디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나 싶었다. 화목제일교회의 노인대학에는 참 많은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더 놀라운 것은 노인대학에 찾아와 이야기도 듣고, 식사도 함께 나누는 이들 가운데 60% 가까이가 교회 바깥의 주민들이라는 점이다.

“노인대학 덕분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이 부지런히 봉사하고 있고, 지역에서도 교회가 하는 많은 일들을 적극 신뢰해 줍니다.”

김영재 담임목사의 말 속에는 동역하는 성도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김영재 목사(오른쪽)와 신성길 원로장로.
김영재 목사(오른쪽)와 신성길 원로장로.

김 목사의 말처럼 화목제일교회 성도들은 실제로 대단히 부지런하다. 지역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과거와 같은 교세는 아니지만 지금도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이웃들에게 나누어줄 선물과 전도지를 들고 장터로 향하며, 누군가를 섬기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최선을 다해 협력한다.

“우리 교회가 현서면 일대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것은 물론이고, 경중노회 산하 84개 교회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회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의 이런 섬김 덕분입니다. 섬김 사역 뿐 아니라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사역에도, 해외선교 사역에도 헌신의 본이 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김영재 목사는 이들과 함께 전도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려 한다. 조금씩 늘어나는 청송 관내 귀농귀촌 인구를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물론, 인접한 도시들로 교구를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의 계획이 있다.

“총회에 사적지 지정을 신청하고, 역사집을 편찬하며,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를 소개하는 전시관을 꾸미는 일 등을 연속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성도들은 물론 이웃들까지 화목제일교회에 더욱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소망이 되는 교회, 말씀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교회라는 슬로건은 김 목사와 화목제일교회 성도들이 계속해서 추구해나갈 비전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그 발걸음에 훌륭한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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