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에 걸친 핍박과 고난 속에도 생명 걸고 신앙지켜

6·25를 전후해 여섯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울산 월평교회의 예배당 전경.
6·25를 전후해 여섯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울산 월평교회의 예배당 전경.

길을 재촉하면서도 내심으로는 6·25 당시 그곳에서 순교자가 나왔다는 게 영 납득되지를 않았다. 낙동강 전선으로부터도 한참 남동쪽인 울산에서 대체 인민군들이나 좌익세력이 무슨 수로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일까.

하지만 취재 약속장소인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에 가까워질수록 모든 게 확실해졌다. 끝도 없는 험준한 산세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묵장산과 치술령 등 해발고도 800m에 육박하는 이 산악지대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전쟁 발발 전부터 이곳은 빨치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산자락 바로 아랫마을의 월평교회는 그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먹잇감이 됐다.

월평마을에 처음 복음이 들어온 것은 1907년경으로 추정된다. 부산·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던 호주장로교회 소속의 겔슨 엥겔(한국명 왕길지) 선교사가 말을 타고 월평마을까지 찾아와 복음을 전했고, 마을의 선비이자 부호였던 우영식이 우여곡절 끝에 첫 신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전도를 완강히 거부했던 우영식은 여러 차례 핍박과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다가오는 왕길지 선교사에게 결국 마음을 열었고, 결국 그의 일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단양 우씨 집안은 그렇게 1910년에 정식 설립된 월평교회의 주축이 되었다. 특히 우영식의 장남 우명범은 월평교회 제5대 조사로 사역하다 나중에는 장로로 봉직하는 등 큰 일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1945년 해방과 함께 극심해진 좌우익 사이의 이념갈등은 월평교회와 우씨 가문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남로당 계열의 인민위원회가 울산에 결성되어 활동하고, 좌익세력이 신불산 가지산 그리고 치술령 일대를 본거지로 삼아 두동면을 중심으로 한 울산서부 5개면 일대에서 암약하며 양민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①예장고신 총회가 월평교회를 순교자기념교회로 지정하며 수여한 기념동판. ②울산 월평교회 순교자들이 최후를 맞은 옛 예배당 터에 ‘순교자의 비’가 세워져 있다. ③순교자 우재만 집사가 생전에 살았던 가옥의 모습. ④순교신앙 선양을 위해 함께 동역 중인 월평교회 당회원들과 울산순교자기념사업회 회원들.
①예장고신 총회가 월평교회를 순교자기념교회로 지정하며 수여한 기념동판. ②울산 월평교회 순교자들이 최후를 맞은 옛 예배당 터에 ‘순교자의 비’가 세워져 있다. ③순교자 우재만 집사가 생전에 살았던 가옥의 모습. ④순교신앙 선양을 위해 함께 동역 중인 월평교회 당회원들과 울산순교자기념사업회 회원들.

첫 희생자는 우영식의 셋째아들이자 우명범 장로의 동생인 우두봉 집사였다. 우두봉 집사는 당시 외지에서 사업을 펼치던 중 1948년 4월 13일 잠시 고향집에 들렀다. 그날 밤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친 무장세력이 그의 집을 약탈하고, 우 집사를 끌어내어서는 동네 마을회관 마당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사살한다.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벌써 순교자가 나온 것이다.

두 번째 희생자는 월평교회 살림을 맡아하던 선임집사 우재만이었다. 이미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부를 정도로 치안부재가 된 상태에서 우재만은 자신을 노리는 세력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밤에는 인근 콩밭에서 지내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귀가하여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을 반복해야 했다.

1950년 2월 25일 그날은 유난히 추위가 매서웠다. 이미 허리가 심하게 아픈 상태였던 우 집사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찬 공기를 피해 집안으로 들어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밤중에 찾아온 이들의 손에 의해 교회당 옆 저수지에서 목숨을 잃는다. 우 집사를 살해한 것으로 모자라 그의 집에 불까지 지른 공비들의 만행 속에서 그의 아내 최재권 권사와 태어난 지 보름밖에 안 된 아들 인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비극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마침내 6·25 전쟁이 발발하고 닷새가 지난 후인 1950년 6월 30일, 자신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한 공비들이 이번에는 아예 월평교회를 급습했다. 밤늦은 시각 여러 성도들이 마당으로 줄줄이 끌려나왔다.

그 중에는 두 번째 순교자 우재만 집사의 아들 우인목이 있었다. 당시 경주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우인목은 정두란(정필수라고도 불림) 집사, 만삭의 몸이던 조재년 성도, 조팔문 전도사의 아내인 정분순 사모 등과 함께 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중이었다. 네 사람에 이어 조천복 장로의 막내 동생인 조말복 성도까지 붙잡혀왔다.

공비들이 총부리를 겨누며 심문하고 협박하는 공포 분위기 가운데도 성도들은 의연했다. 오히려 그들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복음을 전하며 신앙의 기개를 보였다. 분개한 공비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월평교회당 앞에서는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두란 조재년 조말복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정분순 사모는 날아온 총알에 관통상을 입은 채 겨우 생명을 부지했다. 우인목은 총에 맞은 정두란 집사가 자신을 붙잡고 함께 쓰러진 덕분에 기적적으로 부상 없이 살아나 이 참혹한 순교현장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예배당과 사택은 불에 탔다. 이날의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여태 잘 버텨왔던 월평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일상생활을 지속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경주나 부산으로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이듬해인 1951년 8월 14일, 우재만 집사의 가정에 마지막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형이 순교한 후 남은 노모와 형수 등 가족들이 걱정된 우성만 집사가 경주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그가 저녁을 먹고 쉬는 중에 다시 공비들이 집안을 덮치는 일이 발생했고, 결국 우성만 집사 역시 형이 먼저 간 길을 뒤따라가게 됐다.

전쟁이 끝난 후 우재만 집사는 지역을 지키다 순직한 군인 경찰 등과 함께 울산충혼탑에 이름을 새긴 148명 중 한 명이 됐고, 국가유공자 지정을 받기도 했다. 우 집사를 포함한 여섯 희생자들이 순교자 반열에 오르면서, 월평교회는 예장고신 총회로부터 순교자기념교회로 지정받고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2011년 6월 21일 정식으로 지정식을 가졌다.

순교자들이 최후를 맞은 옛 예배당 터는 ‘순교자의 비’라는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돌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졌고, 울주군 두동면 구미월평로 554로 주소를 옮긴 현재의 예배당에는 예장고신 총회에서 수여한 순교지기념교회 동판이 부착됐다.

월평교회 제25대 담임목사로 사역 중인 박대우 목사와 전종철 우재석 장로 등은 “지금도 순교자의 후손들이 월평교회를 비롯한 전국 여러 교회에서 각자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순교신앙을 계승하고 있다”면서 “설립 112주년을 맞이한 월평교회는 이들의 사적을 선양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는 중”이라고 밝힌다.

울산교계 여섯 순교자 추모사업 활발

여섯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사적은 월평교회 뿐 아니라 울산지역 전체 교회를 통틀어서도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울산교계는 이 소중한 신앙유산을 지난해 울산교회사연구소(소장:윤득주 목사)가 발간한 <울산지방 기독교 125년사>를 통해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특히 연구소 부소장인 김종익 장로(울산교회)는 월평교회의 순교사적을 깊이 연구해, 그 역사를 밝히고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왔다.

또한 지난해 12월 20일에는 화봉교회에서 사단법인 울산순교자기념사업회(대표회장:김형태 목사)가 발족해 여섯 순교자의 희생을 추모하고 기리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기념사업회는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순교신앙을 잘 계승해 애국신앙 실천과 다음세대 전수에 힘쓸 것을 선언하는 한편, 울산순교자기념관 건립을 추진해 순교신앙의 산실로 삼는다는 목표를 정했다.

기념관은 월평교회 및 순교자들이 최후를 맞은 장소 주변에 건립한다는 목표로 현재 부지를 물색 중이다. 그리고 건립 추진을 위해 각 교단별·교회별 설명회와 모금운동을 전개 중이다.

또한 이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우재만 집사 등 여섯 순교자들의 순교행적을 극화한 창작뮤지컬 <선물>을 ‘국악동인 휴’와 함께 제작해, 1차로 4월 17일 울산부활절연합예배에서 갈라콘서트 형태로 소개한 데 이어 금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는 울산삼산교회 토라아트홀에서 정식 상연할 예정이다.

기념관이 건립되면 울산지역 최초의 교회인 병영교회, 순교자 손양원 목사가 울산 방어진제일교회를 시무할 당시 자주 찾았다는 대왕암공원 내 기도바위 등을 잇는 기독교 순례코스를 개발하거나 혹은 월평교회 인근에 조성되어있는 6·25 참전 일가4형제 현충시설 등과 연계한 호국순례코스에도 활용한다는 복안이다.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손원재 장로(울산사랑의교회)는 “월평교회의 순교사적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알려야 할 신앙의 큰 모범”이라면서 “이 신앙을 널리 소개하며 다음세대들에게도 물려줄 수 있도록 울산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에 많은 협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후원계좌:농협 351-1214-3397-43(울산순교자기념사업회).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