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수신의 덕목으로 성(誠)을 중요시하여 성심(誠心)으로 사람을 대했던 율곡 이이. 그는 진정한 조선의 사대부로서 사명을 다한 채 49세라는 나이로 1584년 고단한 삶을 마감한 현인이었다.
1574년 선조 7년에 저술한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이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제로 그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時宜)를 읽지 못하면 정치의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시의란 때에 맞추어 법을 만들고 백성을 구하는 것입니다.” 선조께 올린 글이었다. 시대상황에 적합한 법을 만들어 백성을 돌보라는 시의론이 <만언봉사>의 주된 내용이었다. 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특히 목양하는 우리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내용 아닌가?

이이는 성리학의 조선화를 위하여 40세 때인 1575년 선조 8년에 제왕학인 <성학집요>를 저술했고 42세 때인 1597년 선조 8년에는 <격몽요결>을 집필한다. <성학집요>가 조선제왕학의 이론서라면 <격몽요결>은 소학의 이론을 조선화한 성리학적 교과서였다. 그는 <격몽요결> 서문에서 내가 오래도록 인순하게 됨을 걱정하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고 했다. 인순(因循)이란 게으름 혹은 매너리즘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42세의 자신을 경계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이의 인물됨을 보게 된다. <격몽요결> 접인장에서 율곡은 처세의 요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춰내지 말고 범연하게 대하되 왕래하지 말라. 만약 전부터 알던 사람이라면 서로 만나면 한훤, 즉 날씨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점점 멀어지고 원망하거나 노여워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46세에 양관대제학, 즉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에 오른 이이는 조선 사대부의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대제학은 문형(文衡)이라고 불리는데 글을 저울에 단다는 의미로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맡는 사대부의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1583년 시무육계조에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그는 1584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퇴계 이황이 학자로서 생을 마감했음에 비해 이이는 사(士)로서 대부(大夫)가 되어 전형적인 사대부의 삶을 살다갔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선견은 모두 들어맞았고 그가 조정에 건의한 정책은 모두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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