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정암 조광조는 1519년 중종반정으로 조선 왕조가 개혁을 요구하던 시대에 그 중심에서 이일을 시도하다 39세라는 나이로 생을 마감한 미완의 개혁가였다. 조선 선비의 표상으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이룩하려던 그는 한마디로 혁명적 지식인이었다. 너무나 올곧기에 부러진 표본으로 회자되는 그는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하에서 일어난 중종반정의 국가적 여망에 부응하여 등장한 사림의 기수였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훈구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조선선비의 이상인 치열한 학행으로 개혁의지가 넘쳐났던 젊은이였다. 이런 조광조가 17세에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그의 부친 조원강을 따라 가면서 그는 희천에서 귀양살이하던 영남사림의 거물 김굉필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김굉필은 정몽주, 길재, 김종직을 계승하는 영남사림으로 사화의 뿌리였던 성리학적 이념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장차 기묘사화로 운명할 그의 앞날을 예견한 것 같은 사건이었다.

151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5년 34세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한 조광조는 언관직을 수행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업은 채 정치 개혁을 시도한다. 정치의 기본방향을 왕도 정치로 설정한 그는 도의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성현을 본받아서 지치, 즉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대동 사회를 향한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을 실천하기 위하여 여씨향약을 실시했고 소격서 폐지와 함께 미신타파를 추진하면서 중세 합리주의를 표방하였다.

당시 인재 등용문이었던 과거가 문장력을 우선시 했는데 경직된 과거제도의 보완장치로 개설된 현량과로 자신의 동지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해 조광조의 정치적 지지기반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승승장구가 조광조의 몰락을 불렀는데 그것이 위훈삭제 사건이었다. 중종반정의 공신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거짓공훈을 삭제한다는 이 사건은 기묘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그의 개혁세력을 몰락시킨다. 도덕정치에 대한 옳은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조급한 과격성과 방법상 미숙함이 조광조의 개혁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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