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1526년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루터파의 진멸을 시도한다. 당시 오토만 제국의 슬레이만 대제와 신성 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세계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카를 5세에게는 도처에 적이 생기는데 그것이 프랑스 왕실과의 군사적 충돌이었고 로마교황과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따라서 카를 5세는 애초 계획했던 기독교 박해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

1526년 오토만 제국이 침공했을 당시 독일의 루터파 영주들은 개신교 권리를 요청할 제국회의를 요청한다. 이에 황제 카를 5세는 자신의 동생 페르디난트 공작에게 슈파이어(Speyer)에서 회의를 개최하게 한 후 일단 루터파에게 관용을 허락한다. 1528년 카를 5세는 오토만 제국에 승리하면서 1526년 빼앗겼던 부다페스트의 반쪽 부다를 탈환했고 로마를 침공, 자신의 적대자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제압한다.

이때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전에는 황제가 교황편이 되어 나를 핍박하더니 이번에는 황제가 교황을 핍박하여 나를 돕는 상황이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기이하게 일하신다.” 1529년 3월 황제 카를 5세는 상황이 호전되면서 동생 페르디난트를 시켜 제2차 제국회의를 슈파이어에서 열게 하면서 루터파를 불법으로 선고한다. 이에 개신교 영주들은 항의문(Protestatio)을 제출한다. 이 항의문 제목이 프로테스타티오였고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이다.

1529년 10월 오토만 제국의 황제 슬레이만 대제는 헝가리를 장악하고 아예 비엔나까지 침공, 카를 5세로 하여금 또다시 개신교 핍박을 미루게 한다. 이 해 10월 10일 역사적인 비엔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력은 신성 로마의 오스트리아군이 2만, 오토만은 12만의 대군이었다. 비엔나의 상징인 스테판 성당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숙영지로 변한다. 이때 놀라운 자연이변이 생기는데 10월의 눈이었다. 이에 가을 전투만 준비한 슬레이만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1530년 오토만 군대의 위협에서 벗어난 개신교 박멸자 카를 5세는 또 다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국회의를 시작, 루터파를 핍박하는데 이때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카를 5세에게 제출한다. 이후 또 다시 슬레이만의 오토만 군대는 또 다시 유럽을 침공 개신교 박멸자 카를 5세는 10년 간 이 전쟁으로 독일 땅을 떠나있었고, 개신교는 생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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