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1200년대 교황 중의 교황이라 불리던 이노센트 3세가 누렸던 권력은 한 세기만에 종료된다. 중세 말의 교황청은 한마디로 경제적 기관과 같았다. 교황은 영적인 돌봄보다 다양한 명목의 세금징수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면죄부와 성직이 매매되고 있었고 사제들로부터 상납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었다.

A.D 1300년 보니페이스 8세 교황은 희년을 선포했다. 교황 보니페이스 8세는 무너지고 있는 중세와 변화하는 시대를 감지하지 못한 인물로 각국의 국왕들을 봉신으로 취급했다.

프랑스의 국왕 필립 4세는 자국의 교회를 장악하고 교황청에 보낼 헌금을 가로챘다. 분노한 보니페이스 8세는 “교황은 세속 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노라”고 협박 편지를 보낸다. 여기다가 보니페이스 8세는 독일 왕 알브레히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위를 수여하며, 프랑스 국왕보다 더 높은 지위라고 선포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우람한 기사 노가레의 기욤을 사주하여 교황을 구타하게 한다. 실컷 두들겨 맞은 보니페이스 8세는 이 후유증으로 죽었고 역사는 이 교황에 대하여 여우처럼 교황이 되었고 사자처럼 군림하다가 개처럼 죽었다고 했다.

1309년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새 교황을 프랑스 출신 클레멘트 5세로 만들고 아예 교황청을 이탈리아 북부 아비뇽으로 옮긴다. 이 기간을 역사는 아비뇽 포로기라고 부른다. 아비뇽 교황청이 70년이나 지속되자 이탈리아 신비주의 성녀 카타리나는 아비뇽의 교황을 찾아가 로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득한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로마로 돌아오지만 곧 사망하였고 프랑스 귀족들로 구성된 추기경단은 우르반 6세를 교황으로 선출한다.

이후 우르반 6세와 갈등을 빚은 프랑스 귀족들은 클레멘트 7세를 교황으로 또 선출하였다. 그 결과 로마에는 우르반 6세가, 아비뇽에는 클레멘트 7세가 교황으로 있었으며 40년간 교황청 분열이라는 수치의 시대를 만든다. 1409년 사태해결을 위해 피사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피사 대성당에서 알렉산더 5세를 선출했으나 아비뇽과 로마의 교황이 거부하며, 세 명의 교황이 군림하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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