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조선시대는 3년에 한번씩 호적을 정리했다. 당시 호적에는 오늘날의 직업에 해당하는 ‘직역’(職域)이라는 것을 기재하게 했다. 이 직역 중에는 ‘유학’과 ‘학생’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관직이 없는 선비를 살아서는 ‘유학’이라 부르고, 죽어서는 ‘학생’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잘못된 속설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성호사설>을 쓴 안산 출신의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선비는 모두 학교에 속해 있는데 이게 살아있을 때는 학생이 아니란 말인가?”고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유학과 학생은 성균관과 사학(四學), 즉 향교의 생도를 뜻했다. 좀 더 넓은 뜻으로 말하면 큰 공부를 하는 유생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17세기가 되면서 생칭유학(生稱幼學), 사칭학생(死稱學生)이라 하여 살아서는 유학, 죽어서는 학생이라 부른 것이 오늘 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에서 볼 수 있듯이 관직이 없이, 즉 벼슬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조상에게 ‘학생’이란 말을 붙이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생긴 관행이었다. 당시 조선의 국시인 유교를 배우는 유생들 모두를 유학이라 하고 이들을 양반이라 불렀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조선시대 호적대장에는 가족구성과 직계조상, 소유노비 등 인적사항에 대한 소상한 것들이 기재되고 있었다. 특히 호주와 그의 부인에 대한 신상명세도 상세하게 적었다. 특히 그들의 4조(四祖) 성명과 직역도 게재되고 있었다.

즉 호적상에 호주와 그의 부인의 4대조의 신분, 혼인관계까지 소상히 등재되어 신분이나 가계를 확인하는 데는 호적대장이 최고였다. 17세기 후반 유학을 하는 비율이 전체인구의 4~5퍼센트였고, 18세기 초반에는 10퍼센트, 19세기 초반에는 40~50퍼센트 대에 이르렀다. 조선후기 절대다수가 신분상승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조선후기에 호적의 직역 자체가 형식화된 것은 물론이고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면서 군역에서 벗어나려고 거짓으로 호적상에 유학이라 기재하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이는 신분사회로 출발했던 조선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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