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제국주의 침탈로 고통 받던 시절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확장되고 있을 때, 안정된 삶의 영위는 하나의 희망사항이었다. 불안한 삶과 만성적인 실업은 식민지 조선인들을 투기라는 열풍으로 몰아갔다. 1920~1930년대 투기 열풍은 미두와 금광 투기였다. 미두는 미두장(米豆場)의 준말로 인천, 군산, 부산의 곡물거래시장에서 이루어진 쌀 거래를 의미한다.

당시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생산물이었던 쌀의 집하와 거래를 위하여 개설된 미두거래소에 선물거래를 통해 투기적 차익을 얻고자 하는 투기꾼들이 모이면서 미두장은 이판사판의 투기장이 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민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미두장을 찾았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조선인들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탕진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미두 열기는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 됐다. 언제나 그렇듯 미두 투기는 수많은 성공과 몰락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미두 투기가 통제된 것은 1939년이 되면서였다. 당시 일제는 전시체제에 들어서면서 전쟁을 위한 식량 확보로 미곡 거래가 금지되었다. 미두 투기의 열기가 서서히 사라져 갈 때, 또 하나의 투기가 태풍처럼 몰아쳤는데 그것이 금광 열풍이었다. 1931년 12월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그것은 일본정부가 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 수출 금지와 밀매 단속을 시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순식간에 금광 열풍에 휩싸인다. 금광의 열풍은 수많은 사람을 패가망신케 했다. 이런 와중에 성공신화를 만든 사람이 조선일보 사장이면서 금광 갑부였던 방응모였다. 평안도 정주 출신의 방응모는 1926년 한 폐광에서 금맥을 찾아내는데 성공 금광왕이 되었다. 그가 경영하던 교동광산은 인부 인원만 천 명이 넘을 정도로 큰 규모의 금광이었다.

당시 또 한 사람의 성공신화가 최창학이었다. 이 사람은 삼성금광의 사장이었는데 당시 천만장자의 반열에 올라 명성을 구가했다. 이러한 광맥은 하루 70전의 광산노동자들에 의하여 채광되었다. 광산 소유주 아래에는 지배인, 덕대, 기술자, 하급 기술자, 채급노동자로 연결되는 착취의 피라미드가 먹이사슬로 작동되고 있었다. 황금광의 광풍은 조국산하를 훼손시키면서 1920~1930년대 식민지 시대의 불안한 현실을 보여준 어두움의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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