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700년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그라나다 왕국을 몰락시킨 해였다. 소위 레콩퀴스타(Reconquista), 즉 재정복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술탄 무함마드 12세로 하여금 장탄식(the last sigh of the Moor)과 함께 저들 영화의 상징인 알람브라 궁전을 남겨둔 채 아프리카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1492년의 두 번째 사건이 알람브라 포고령이다. 이는 유대인의 추방과 이단 심문이었다. 이 포고령은 가톨릭의 개종을 명한 사건으로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의 반기독교적 태도는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당시 이사벨라 여왕은 국가의 임무가 기독교 신앙의 수호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유대교의 행태가 묵과 될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10만 명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인정받았지만 여기에 순응 못한 10만 명의 개종 거부자들은 이들에 대하여 관용의 땅이었던 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오토만제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1492년의 세 번째 사건은 이사벨라의 후원아래 진행된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이었다. 신대륙의 선취권을 갖게 된 스페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1400년대 말 막강한 스페인 시대를 열어갔다.

권력과 부를 마음껏 누린 이사벨라는 이런 영화 뒤에 또 다른 비극을 겪는다. 6명의 자녀를 둔 그녀였으나 남편 페르디난도와는 남남에 가까웠다. 장녀 이사벨은 포르투갈의 알폰소 국왕에게 출가했으나 과부가 되었고 또 다시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재혼했으나 아들 미구엘을 낳고서 운명했다. 그리고 이 아이도 두 살때 운명한다.

이사벨라의 차녀 후안나는 남편 필리프로부터 버림받고 가문 내력인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결국 광녀로 불리며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1497년 이사벨라의 장남 후안은 1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1501년 이사벨라의 막내딸인 캐서린은 영국 왕자 아서에게 시집갔으나 반년 만에 남편이 죽어 7년을 기다리며 헨리 8세와 결혼한다. 기품의 이사벨라는 환희와 동시에 비극의 여인으로 말년을 우울하게 보내다 1504년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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