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도, 대구는 여전히 읍성 내부를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구도심(old town)과 신도심(new town) 사이의 지역적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곳이 바로 대구이다.물론 계속되는 개발로 근대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다른 도시들에 비해 100년 전의 모습, 특히 대구 선교가 시작되었던 시대의 모습을 비교적 많이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 도로 주변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겨운 골목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품은 채로 사람들
동성로는 대구읍성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 난 길이다. 앞서 오목조목 대구골목 11번째 이야기에서도 말했듯이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에 의해서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난 뒤 바로 그 자리에 신작로가 만들어졌고, 대구읍성의 동쪽 성벽에 해당하는 길을 동성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동성로는 대구 제일의 중심가이자 수많은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며, 대구의 청춘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젊음의 거리이기도 하다.동성로를 걷다보면 그 자체로 거리의 박물관을 체험할 수 있다. 대구시는 대구읍성의 돌을 모아서 동성로 곳곳에 깔았다. 그래서 이 거
오목조목 대구골목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두사충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지관으로 참전했던 사람이 바로 두사충이다. 이순신 장군과도 막역한 사이였던 두사충은 충무공이 한산도에 주둔할 때 함께 지내며 친분을 쌓았다.노량해전에도 함께 참전을 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잡아주었다고도 전해진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는 명나라로 돌아갔었지만, 정유재란이 끝났을 때에는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그런데 두사충은 왜 조선에 귀화했을까? 명나라의 미래를 예견했기
대구 약전골목(약령시)은 육체를 치료하는 길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대구에는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삼남에서 가장 큰 시장인 서문시장이 생기면서 대구는 사람들과 물자가 함께 모이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대구 약령시의 기원은 대략 1630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니, 거의 4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다. 처음에는 매일 모이는 상설시장이 아니었다. 경상감영 주변에서 음력 2월 1일부터 모이는 춘령시(春令市)와, 음력 10월 1일부터 모이는 추령시(秋令市)로 약령시가 시작된 것이다.대구 주변 고령, 칠곡, 의성, 군위,
요즈음은 신발을 사는 일이 어렵지 않다. 대형마트나 신발매장에 가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기성품 구두와 운동화를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선택하면 그만이다. 심지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해외의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오른발과 왼발 양쪽이 똑같은 사람은 거의 없고, 발 모양도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사기 위해서 많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경우들도 있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고 하는 만큼 편한 신발을 찾는 일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옷을 맞추듯
‘진골목’은 말 그대로 좁은 골목이다. 진골목에 들어서면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칠 것만 같다. 넓은 대로(大路)들이 도시를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는 나라에서, 그리고 그 길을 자동차로 씽씽 달리는 것에 익숙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렇게 좁은 골목이 생소하기도 할만하다. 하지만 골목은 원래 이런 곳임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진골목이다.진골목의 원래 뜻은 ‘긴 골목’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길다’를 종종 ‘질~다’라고 발음한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진골목은 그리 길지 않다. 한 100~200미터 남짓 될 뿐이다. 그런
대구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현제명과 박태준 등이 바로 자랑스러운 대구 출신 기독교인들이다. 대구에는 이미 1900년대 초에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07년 신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고, 1916년 박태준의 지휘로 남성교회에서 대구 최초로 찬송가 합창공연이 열렸다. 이듬해인 1917년에는 박태준, 현제명 등이 참여하는 제일교회 찬양대가 조직되었다.그런데 대구에는 음악과 관련된 또 다른 족적이 있다. 그 주인공은 대구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사문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바흐가 들리는 곳”(6·25한국전쟁 중 외신기사) “이곳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절제와 고요함만 있다.”(2020년 미국 ABC방송)두 외신기사는 같은 도시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과연 어디일까? 맞다. 그 도시는 바로 대구다. 6·25의 폐허 속에도 대구는 여유를 잃지 않았고, 2020년 코로나19의 광풍 속에서도 대구는 고난을 의연하게 잘 견뎌내는 중이다.그런데 6·25전쟁 중에 바흐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바로 1951년에 문을 연 향촌동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였다.
필자에게는 세 명의 자녀들이 있다. 셋 다 중학교는 계성중학교를, 고등학교는 남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이 두 학교는 대구선교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계성중학교는 1906년 계성학교라는 이름으로 대구선교의 아버지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고, 남산고등학교는 1907년 부루언 선교사의 아내 부마태 선교사에 의해 신명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물론 이 학교들이 세워지기 전 1900년 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대구 사립초등학교의 효시인 ‘야소교 대남소학교’도 있고, 1902년 부마태 선교사가 세운 ‘신명여자소학교’도 있다. 하지만
현재 대구의 가장 번화가는 동성로다. 동성로는 대구의 중심에 있고, 가장 발달한 상권을 갖고 있으며, 젊은이들의 거리로 명성을 누린다. 하지만 대구에는 동성로(東城路)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성로(西城路), 남성로(南城路), 북성로(北城路)도 있다.거리의 이름을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의 존재이다. 이 거리의 원래 자리에는 성이 있었다. 대구읍성이 대구 원도심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명언이 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정복하면 그곳에 길을 닦았다. 가장 강력한 군대를 소유했던 로마는
민수기 22장에서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 발람을 나귀를 사용하셔서 꾸짖으셨다. 매일 자기가 타고 다니던 나귀의 입이 열렸을 때, 발람은 얼마나 놀랐을까, 또한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얼마나 기이하고도 황당했을까? 이처럼 하나님은 중대한 순간에 동물들까지 사용하시는 놀라운 분이시다. 선지자 엘리야에게는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지 않으셨던가.부루언 선교사(한국명 부해리)는 1899년 10월 26일부터 일제에 의해 추방된 1941년까지 대구·경북지역에서만 사역을 한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한 선교사다. 그는 25세
일반적으로 나무들은 사람보다 수명이 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을 후세의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할 때, 그리고 ‘내가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을 때 나무를 심는다. 사람은 죽어도 나무는 그 자리에 서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조선시대 마지막 왕 순종도 그랬다. 1909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 총독과 함께 경상도지역 대구, 부산, 마산을 순행했다. 그해 1월 7일 순종은 대구에 도착해 기생들의 공연을 관람한 후, 달성공원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수종(樹種)인 가이즈카 향나무를 각각 한 그루씩 심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길…’, ‘또 하루 멀어져 간다….’ 한 소절만 들어도 마음이 아련한 이 가사들은 대구 출신 가수 김광석의 노랫말이다. 흔히 김광석을 영원한 가객이라 하고,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로 여긴다. 20대는 ‘이등병의 편지’를, 3~40대는 ‘서른 즈음에’를, 노인이 되어서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즐겨부르니 말이다.대구 수성교 옆에는 70년 된 방천시장이 있고, 그 곁에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하 ‘김광석길’)이 있다. 2019-2020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고, 매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요즘 심심찮게 듣는 말이다. 4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봄은 먼 듯하다. 그만큼 대한민국과 대구는 큰 고난을 통과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시 전체를 다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 첫 구절만 들으면 “아하!”하며 무릎을 치게 된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 시를 지은 이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이상화이다. 이상화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대구서문시장 부근이라고 한다. 그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그래서인지 달성공원에 얽힌 에피소드도 정말 많다. 대구시민들은 달성공원을 산책하고, 이 공원에 조성된 대구 최초의 동물원에서 소풍과 가족 나들이를 하곤 했다. 달성공원은 대구시민의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달성공원은 ‘달성토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달성은 석축 즉 돌로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흙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서기 216년 2월에 달성토성을 건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니, 참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성이다. 1736년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