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태 목사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요즘 심심찮게 듣는 말이다. 4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봄은 먼 듯하다. 그만큼 대한민국과 대구는 큰 고난을 통과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시 전체를 다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 첫 구절만 들으면 “아하!”하며 무릎을 치게 된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시를 지은 이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이상화이다. 이상화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대구서문시장 부근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구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1943년이었으니, 해방을 불과 2년 앞두고 만42세로 요절한 것이다.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상화 시인이 세상과 작별을 고한 대구의 고택.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상화 시인이 세상과 작별을 고한 대구의 고택.

이상화 시인이 생을 마감한 그의 고택은 대구 근대골목투어의 2코스의 한 가운데 있다. 한 때 도심개발로 철거될 뻔도 했지만, 수많은 대구시민들의 서명과 모금으로 보존되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코로나19 전염병 때문에 대문이 굳게 닫혀, 고택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빼앗긴 봄을 다시 찾는 날, 그 대문도 활짝 열릴 것이다. 다시 그 골목을 걸으며, 빼앗긴 들을 안타까워했던 시인의 마음으로 이상화 고택을 찬찬이 둘러볼 날을 소망해 본다.

그렇다면 이상화 시인이 바라보았던 ‘빼앗긴 들’은 과연 어디였을까? 시에 나오는 ‘빼앗긴 들’의 실제 배경은 현재 대구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수성못 인근이다. 지금은 엄청나게 개발이 되어서 옛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본디 수성못 북쪽에는 너른 들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상화 시인은 지금의 수성구 상동, 중동, 두산동, 황금동 일대에 있던 들판을 바라보면서 시를 지었고, 겨레의 고통을 함께 하고 사람들의 민족혼을 깨웠다.

지금도 대구 곳곳에는 이상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시인의 묘소 근처에는 ‘상화로’라는 이름이 붙은 도로가 나 있고, 두류공원과 달성공원에는 이상화 시비(詩碑)가 건립되어있다. 그리고 빼앗긴 들 인근의 수성못에는 ‘상화동산’이 조성되어 있어 시인의 뜻을 되새길 수 있다. 겨레를 사랑했고, 민족의 고난을 안타까워했던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그 길들을 걸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해는 1926년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참으로 어둡고 추운 시절이었다. 그 암울한 시대에 이상화는 온 겨레가 빼앗긴 소중한 것들을 안타까워하며 처절하게 노래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교회들은 스스로 어떤 것을 빼앗기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교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일에는 너무도 무관심한 게 아닐까? 이상화의 저항정신이 깃든 골목길을 걸으며, 금과 은은 얻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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