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태 목사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그래서인지 달성공원에 얽힌 에피소드도 정말 많다. 대구시민들은 달성공원을 산책하고, 이 공원에 조성된 대구 최초의 동물원에서 소풍과 가족 나들이를 하곤 했다. 달성공원은 대구시민의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 달성공원에서는 부활절 연합 새벽기도회가 열리는 날이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다시 사신 예수를 목소리 높여 찬양했다. 코로나19로 집회가 어려워진 이 시절에 그 감격이 새삼 그리워진다.
대구 달성공원에서는 부활절 연합 새벽기도회가 열리는 날이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다시 사신 예수를 목소리 높여 찬양했다. 코로나19로 집회가 어려워진 이 시절에 그 감격이 새삼 그리워진다.

달성공원은 ‘달성토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달성은 석축 즉 돌로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흙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서기 216년 2월에 달성토성을 건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니, 참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성이다. 1736년 대구읍성을 쌓을 때까지 이 지역 대표 읍성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 바로 달성토성이다.

그런데 달성공원은 대구 선교역사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먼저 달성공원 안에 있는 관풍루(觀風樓)가 그러하다. 관풍루는 1906년 대구읍성이 허물어질 때, 읍성 위에 위치해있던 것을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옮겨온 것이다.

아담스 선교사가 1897년 11월 부산에서 대구로 이사 왔을 때, 너무 늦은 밤이 되어서 대구읍성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대구읍성의 수문장은 관풍루에서 아담스 선교사를 내려다보았으리라. 아담스 선교사는 성문을 열어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굳게 닫힌 성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아담스 선교사는 어떻게 그 늦은 밤에 대구 읍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아담스 선교사는 미국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무사히 도착했다는 편지를 빨리 보내고 싶다고 간청했고, 당시 대구를 관할하던 관찰사는 서양인도 부모님에게 효를 다한다는 사실에 감동해서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아담스 선교사는 지혜와 강청으로 대구읍성 문을 열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대구 땅에 복음의 문도 활짝 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달성공원과 대구 기독교의 깊은 관계는 바로 이 장소에서 매년 열린 부활절 연합 새벽기도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대구의 중장년층 성도들에게는 달성공원하면 부활절이 바로 생각난다. 이 지역 출신 목사들도 저마다 어린 시절 달성공원에서 부활절 새벽기도회를 드린 추억을 가지고 있다.
1970~1980년대 대구의 성도들은 깨끗하게 세탁한 흰 옷을 입고 달성공원으로 모여서 부활의 아침을 맞았다. 한 때는 부활절 연합새벽기도회에 3만 명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대구는 전국적으로도 가장 대규모의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비록 올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하여 대규모의 연합예배가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부활의 증인이 되려는 성도들의 열망은 오히려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달성공원에 가게 된다면 공원 전체를 가득 채운, 흰옷을 입은 무리들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우리 역시 이 시대에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기도하고 헌신한다면, 다시 한 번 부흥의 역사가 대구 땅과 온 나라에 가득하게 되지 않을까?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