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태 목사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바흐가 들리는 곳”(6·25한국전쟁 중 외신기사) “이곳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절제와 고요함만 있다.”(2020년 미국 ABC방송)
두 외신기사는 같은 도시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과연 어디일까? 맞다. 그 도시는 바로 대구다. 6·25의 폐허 속에도 대구는 여유를 잃지 않았고, 2020년 코로나19의 광풍 속에서도 대구는 고난을 의연하게 잘 견뎌내는 중이다.
그런데 6·25전쟁 중에 바흐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바로 1951년에 문을 연 향촌동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였다. 당시 한 외신이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듣고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라고 타전해서, 온 세계에 화제와 감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실 대구에는 르네상스보다 5년이나 빨리 시작한 음악감상실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1946년 향촌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클래식 음악감상실인 ‘녹향’(綠香)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성악가를 꿈꾸던 고 이창수 선생이 SP레코드판 500여 장과 축음기 1대로 클래식 음악을 지인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하면서 ‘녹향’은 시작되었다.
대구 향촌동은 6·25전쟁 때 피난 온 예술가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예술가들은 대구의 다방과 여관에 삼삼오오 모여서 시를 발표하고, 음악회를 열고, 그림을 그렸다. 녹향과 르네상스, 그리고 백록다방, 모나미다방, 백조다방 등은 이들이 예술혼을 불태우는 공간이었다. 화가 이중섭은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고, 구상 시인은 시를 썼고, 청록파 시인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이 작품을 쏟아 내었다.
예술가들은 전쟁의 고단함 속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또한 국민들에게 여유와 위로를 선물해 주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예술가들이 모이던 다방과 여관들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표지석만이 당시의 예술혼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 예술가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공간이 있다. 바로 향촌동 9-1(대구 중구 중앙대로 449)에 있는 향촌문화관이다. 향촌문화관에 와서 예술가들의 흔적과 근대 대구의 풍경을 둘러보고, 지하에 있는 ‘녹향’에 들러 클래식을 감상해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인 녹향은 여러 차례 경영난을 겪으면서도, 대구시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남았고, 지금은 향촌문화관 지하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은은한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다.
이곳에 찾아와 좋아하는 클래식 한 곡을 들려달라고 부탁하면, 녹향을 시작했던 고 이창수 선생의 아드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음악을 찾아줄 것이다. 필자도 이곳에서 드보르작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를 신청해서 감상했다. 여러분이 듣고 싶은 신청곡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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