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태 목사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사이드보탐 선교사가 대구 땅에 최초로 들여온 피아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문진 나루터의 조형물들.
사이드보탐 선교사가 대구 땅에 최초로 들여온 피아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문진 나루터의 조형물들.

대구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현제명과 박태준 등이 바로 자랑스러운 대구 출신 기독교인들이다. 대구에는 이미 1900년대 초에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07년 신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고, 1916년 박태준의 지휘로 남성교회에서 대구 최초로 찬송가 합창공연이 열렸다. 이듬해인 1917년에는 박태준, 현제명 등이 참여하는 제일교회 찬양대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대구에는 음악과 관련된 또 다른 족적이 있다. 그 주인공은 대구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사문진 나루터이다. 여기에 가면 신기하게도 수많은 피아노 조형물들이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가을이면 피아노 100대가 한 곳에 모여 장관을 이루며, 정기연주회를 열기도 한다. 나루터와 피아노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유가 있다. 이곳이 바로 대구 최초로–대구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라고 주장한다-피아노가 들어온 나루터이기 때문이다.

1899년 사이드보탐(Sidebotham·한국명 사보담) 선교사가 부산을 거쳐 대구로 부임했는데, 그의 아내 에피 선교사는 고향에 두고 온 피아노를 몹시 그리워했다. 결국 사이드보탐 선교사는 미국에 있는 피아노를 대구로 옮기는 엄청난 작전을 감행한다. 선교사의 피아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서 부산을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1900년 3월 26일 사문진 나루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사문진 나루터에서 무려 16km나 떨어져 있는 대구 종로(지금의 약전골목)의 선교사 자택까지 무거운 피아노를 어떻게 운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20~30여 명의 일꾼들이 막대기를 피아노 아래에 넣고, 마치 상여를 메는 것처럼 어깨에 메고 옮겼는데 선교사 자택으로 옮기기까지 무려 사흘이 걸렸다고 한다.

생전처음 서양 피아노를 본 대구사람들은 피아노에서 나오는 웅장한 소리 때문에, 안에 귀신이 산다고 생각해서 피아노를 ‘귀신통’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피아노의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나올 때,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피아노는 ‘귀신통’이 아니라, ‘복음통’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대구 최초(혹은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는 사이드보탐 선교사가 부산으로 사역지를 이동하면서 함께 이사(?)를 갔고, 그 후 행방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이드보탐 선교사가 피아노를 들여온 바로 다음해인 1901년에 사문진 나루터로 또 하나의 피아노가 들어와 대구에 상륙한다. 동산의료원을 세운 우드브리지 존슨 선교사가 들여온 피아노가 바로 그것인데, 지금은 청라언덕의 챔니스 주택에서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 피아노의 위엄을 자랑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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