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태 목사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대구 약전골목(약령시)은 육체를 치료하는 길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대구에는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삼남에서 가장 큰 시장인 서문시장이 생기면서 대구는 사람들과 물자가 함께 모이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대구 약령시의 기원은 대략 1630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니, 거의 4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다. 처음에는 매일 모이는 상설시장이 아니었다. 경상감영 주변에서 음력 2월 1일부터 모이는 춘령시(春令市)와, 음력 10월 1일부터 모이는 추령시(秋令市)로 약령시가 시작된 것이다.

대구 약전골목은 병든 이들이 약재로 육신을 치료하는 곳이자, 복음으로 영혼을 치료받는 곳이기도 했다.
대구 약전골목은 병든 이들이 약재로 육신을 치료하는 곳이자, 복음으로 영혼을 치료받는 곳이기도 했다.

대구 주변 고령, 칠곡, 의성, 군위, 영양, 봉화, 예천, 선산, 합천 등의 고장들은 예로부터 질 좋은 한약재로 유명했다. 거기서 생산되는 한약재들이 교통과 물류가 원활하고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대구로 몰리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대구 약령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봄과 가을 약령시가 열릴 때마다 약재상들과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음은 당연하다.
변변한 치료법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대에 한의학에만 의지했던 사람들은 대구 약령시에서 약재를 구했고, 병든 육체를 치료하려고 애를 썼다.
처음에는 경상감영 근처에서 시장이 형성되었지만, 1908년에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약령시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 무렵 약령시의 자리는 영혼을 치료하는 길로 변하기 시작했다. 대구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이 약령시를 찾아오면서부터였다.
1893년에 대구에 도착한 베어드 선교사가 전도를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약령시였다. 베어드 선교사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약령시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도 책자를 나누어주었고, 대구야말로 경상북도 복음화를 위한 전략적 장소라고 판단하였다. 때문에 베어드 선교사는 현재의 약전골목 한 가운데 대구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약령시를 전도에 본격적으로 활용한 인물은 베어드 선교사의 후임 아담스 선교사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약령시에 사랑방을 만들어 낮에는 복음서적을 판매하고, 밤에는 전도집회를 열었다. 이 사랑방은 멀리서 온 길손들이 하루를 쉬는 안식처와 식사를 대접받는 장소일 뿐 아니라 복음을 듣는 접촉점도 되었다. 약령시를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연약한 육체로 힘들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도 마음이 쉽게 열렸음은 당연하다.
대구에 약령시가 열리기보다 훨씬 앞서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육체와 영혼을 함께 치료하셨다. 이 모범을 1893년 이후로 대구에 온 선교사들도 그대로 따랐고, 약전골목을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치료하는 골목으로 변화시켰다. 2020년의 대구 교회,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교회들이 이 사명을 잘 이어받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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