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에는 선거운동 중단합니다”
신앙양심 지켜온 정치·인생 여정 … 주일성수는 삶과 가치 지탱해 온 뿌리


 
▲ 유재건 장로는 여든을 앞둔 지금, 평생 간직해 온 주일성수 신앙이야말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지탱해 온 뿌리였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일에는 선거운동 안 합니다.”

폭탄선언이었다. 선거가 코앞이었고, 상대후보들은 경력이나 인지도 면에 있어서 널리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정치 신인인 초짜 후보가, 가장 바삐 뛰며 유권자들을 만나야 할 일요일에 선거운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CGN TV 대표이사 유재건 장로(온누리교회·79세)는 신앙적인 소신을 지키느냐, 현실에 타협하느냐의 기로에 섰던 그 치열했던 시간들을 담담하게 추억한다. 미국에서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고, 한국에 건너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한창 인기를 누리던 1996년 당시의 이야기이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성북구에 출마했습니다. 정계활동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생소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지요. 막상 선거운동에 돌입해보니 말로만 듣던 혼탁한 풍토에 질렸고, 양심에 부딪치는 일들을 자꾸 겪게 되더군요.”

특히 신앙적인 갈등이 그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고심하고 기도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요지는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는 하루 5000명과 악수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선거운동에 나서겠다. 하지만 주일에는 무조건 쉬겠다’는 것이었다.

“당원들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혀를 찼습니다. 비웃으며 등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지요. 하지만 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지자들과 매일 새벽 5시에 함께 모여, 먼저 예배한 후 선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표가 급해도 신앙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극적인 당선이었고, 그의 정치 여정은 3선 국회의원 그리고 훗날 국회 국방위원장, 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 한미의원외교협의회 회장 등 다채로운 활동들로 이어진다. 신앙을 우선 가치로 여겼던 그의 자세는 이후 의정생활에도 여실히 나타난다.

국회의원 재직시 국가조찬기도회장을 맡아 매월 첫 주 수요일 아침 7시에 기독 의원들의 기도회를 정례화했다. 당시 집회 강사로 초청된 설교자들의 말씀을 책으로 제작해 배포하는가 하면, 평소 기독 정치인의 모델로 삼아온 영국 노예해방의 선구자 윌버포스의 전기 300권을 구입해 동료 의원들에게 나누어 준 일화도 있다.

“여당 시절과 야당 시절을 두루 경험했지만 사실 정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깨끗한 국회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죠. 한 편으로는 아무리 지역구 표심과 관련되어 있다 해도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 지내는 행사에는 신앙 양심상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원희룡 제주지사도 신앙적인 이유로 한라산 산신제 집례를 거부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유 장로가 한결 같은 모습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어린 시절부터의 탄탄한 신앙적 뿌리가 큰 작용을 했다. 소년가장으로 살았던 어린 시절, 자칫 삐뚤어질 수도 있었던 그를 다잡아준 것이 동네 교회 목사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신앙생활이었다.

이후 평생의 은인이자 스승이 되어 준 박경룡 목사의 가르침에도,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어머니의 모범에도 공통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십계명의 네 번째 항목인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이었다.

“교회를 통해 한글을 깨치신 후 늘 성경을 곁에 두고 사셨던 어머니는 신앙에 있어서 철저하고 단호한 분이셨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이토록 큰 은혜를 주셨는데 주일성수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면 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엄하게 교훈하셨답니다. 그 덕택에 오늘날의 제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비록 두 사람의 바람처럼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지는 못했어도, 대신 장로가 되어 열심히 섬기고 현재는 전 세계 8000여 선교사들을 섬기는 복음방송을 경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 분들의 기도는 어느 정도 응답이 된 게 아니냐고 유 장로는 반문한다.

주일성수를 통해 다져진 신앙은 유 장로에게 담대한 확신과, 정의로운 편에 서는 용기도 심어주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30대 들어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철수씨 구명운동에 앞장선 일이다.

당시 구명위원회 위원장과 변호사를 겸해 맡아 무려 7년간이나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무죄 판결을 기어이 받아냈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그는 아시아 출신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게 됐고, 고국의 부름을 받고 귀환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달동네에서 찹쌀떡을 팔고 신문을 배달하면서 어른이 되면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결국 변호사로서, 정치인으로서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유 장로는 한국교회가 오늘날 부딪치는 안팎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음세대의 신앙, 특히 주일성수 신앙을 바로 세워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면서 기독신문과 총회교육국이 전개하는 주일성수 캠페인에 대해서도 강력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가정에서부터 아이들을 신앙으로 잘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저희 가정은 지금도 새해를 맞으면 손자들까지 모두 모여 가족예배와 소망을 나누는 시간으로 일 년을 시작합니다. 주일성수는 특히 신앙의 기본으로서 잘 가르쳐야겠죠. 주일은 ‘주님의 날’인 동시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유재건 장로는 누구

유재건 장로는 1937년 서울 성북구에서 태어나 경기중고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 법과대학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연방정부 지역사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이철수씨 구명운동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아세안을 위한 법률구조처와 LA 소재 법률사무소 등에서 활동하다, 한국으로 건너와 1993년 MBC TV <시사토론> 진행자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제15대 총선에 당선된 이후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2012년부터 제3대 CGN TV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며, 한국유네스코협회연맹 회장직도 맡고 있다.

200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고, 참여연대로부터 부패방지법 지킴이상(1998)을 받고, 백봉 나용균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올해의 신사의원’(2006년)에 선정된 바 있다. 2011년에는 자전 신앙수기인 <은혜인생>(두란노)을 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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