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권위와 권력은 모두 다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권위는 서서히 선한 영향력으로 번져가고, 권력은 급속도로 악한 영향력으로 퍼져간다. 권위가 없는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과 유익,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실행하면서 산다. 음모가 난무하는 사회, 그 단체는 늘 혼란과 격변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음모는 사회와 단체를 피폐하게 하고 병들게 한다.

제109회 총회의 장로 부총회장 선거는 음모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총회 현장에서 덕스럽지는 않았지만 덕스럽게 덮었는데, 다시 총회 임원회에서 총회개혁을 위해 재조사를 감사부에 명하고, 감사부는 조사해 ‘돈 받은 선관위 임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미흡하다고 더 보완 조사해 보고하라’고 재지시하니 또 감사부는 이번에는 ‘돈 가져다준 선관위 위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니 이런 조사 결과를 누가 믿겠는가? 결국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 됐다. 음모가 난무하는 사회와 단체 속에서 살면 피해망상, 불신, 끝없는 의구심, 그리고 무력감에 젖어 살 수밖에 없다. 

사회학자들은 현실사회에 음모론이 횡행한다는 것은 그 사회나 단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징후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음모론은 현재의 세계가 불공정과 불만족, 부정과 불평등이 더 심화되고, 이러한 현실을 기존의 이론들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때라고 한다. 결국 음모론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사회나 단체, 또는 집단이 되면 누구든지 자신들은 위협 당하고, 박해와 비난을 받고, 부당하게 취급 당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음모론의 사회는 반응이 있어도 반성은 없다. 반성이 없는 사회, 다시 말해 회개가 없는 사회와 교회에는 음모론이 권력의 힘을 가지고 권위를 말살하며 죄를 소극적 실체로 규정해 변질과 변태를 변화로 만들고 권위적인 권력으로 둔갑한다.

우리에게 있는 교권이라는 권위의 권력은 권위적인 것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교권은 권력이 됐고 결국 권력이 된 교권은 권위적이 돼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산물이 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된 권위를 부정한다. 은혜를 부정하는 교권 속에는 사실상 참된 신앙은 없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음모론을 배격할 뿐 아니라 권력의 힘에 직조되는 조직이라는 천의 옷을 성공의 메이커로 입지 않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제108회 총회 선관위의 109회기 목사 부총회장 후보에 관한 결정을 보자. 이 결정은 한 후보자에 대해서 소급 적용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결정이었다. 규정대로 해석하면 된다. 그런데 후보자 개인에 대한 자격심사를 해서 “할 수 있다, 없다”로 결정하고 그것도 두 번의 투표를 통해 “할 수 없다”로 결정했다. 107회기 선관위에서는 이번 선관위와 같이 108회 목사 부총회장 후보에 대해 7:7의 동수가 나오자 법리상 부결인데도 위원장이 가결로 결정해 자격을 줬다. 물론 그때의 안건과는 다른 건이지만 권력이 돼 버린 교권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언제든지 권력은 경쟁자의 부재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그래서 마타도어를 만들어 내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권위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스스로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권위를 가지며, 썩어가는 곳에서는 소금이 되고, 어둠이 있는 곳에서는 빛이 된다. 그래서 권력은 살검(殺劍)이 되지만 권위는 활검(活劍)이 된다.

지금 우리는 교권이라는 권력을 잡기 위해 개혁신학과 신앙을 신어 보지도 않고 헌신을 버리듯이 버린다. 더욱더 음모론과 결합된 신앙은 권위적이 되려고 권력을 탐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그 책임은 음모집단에 있다고 한다.

총회의 선관위는 반성 없이 반응만 하고 선관위의 집합적 결정에 점유되는 권력 연속체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 문법에도 “이중부정은 긍정이다”라는 말이 있다. 두 번의 “아니다”의 결정이 제109회 총회 현장에서 “그렇다”의 결정으로 또 살아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실 거대한 불길이 작은 불씨에서 발화되듯 모든 비극은 작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활검을 쓰는 권위를 언제 우리 총회에서 볼 수 있을까? 그래야 우리에게 샬롬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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