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동네 옛 백제병원에서 우리 초량교회 앞을 지나 168계단 끄트머리까지가 이른 바 ‘이바구골목’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골목이다.‘이바구’란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다. 그러니 이야기 골목인 셈이고, 그 이바구란 다름 아닌 오랜 시간 속에 녹아있는 초량 사람들의 인생과 애환에 대한 이바구다. 골목이 추억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이유는 오랜 세월에 녹아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곧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다. 초량 이바구골목에는 그러한 삶의 이야기들이 습한 담벼락의 이끼처럼 끼어서 자라고 있다.청마(靑馬) 유치환도 그
정월 대보름. 자정이 가까운 밤에, 흘러가는 구름사이로 둥근 달의 얼굴이 들어갔다 나왔다 숨바꼭질을 한다. 창가에서 눈을 돌려 책상을 보니 30년이 넘도록 잡아온 카메라가 뚜껑이 열린 채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동안 작은 종으로 목회를 감당하면서, 저 보름달처럼 수없이 초승달·반달·만월·반달·그믐달을 반복해 사는 동안 한 번도 내 손을 떠난 적 없이 동행해 온 카메라였기에 감회가 깊다.특별히 한쪽 눈과 손에 장애가 있고, 기관지확장 등으로 건강 나이는 이미 80세나 마찬가지인 몸으로 주 하나님 지으신 지구, 전체 둘레 4만km의
초량에는 차이나타운(China Town)이 있다. 말 그대로 중국거리요 중국마을이다. 거리 전체가 붉은색 꽃등과 붉은색 간판으로 덮여있고, 대부분 중화요리집들이다. 오전 열시가 조금 넘으면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여 늦은 저녁까지 열기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초량에 차이나타운이 있는가?’ 궁금해 한다. 우리가 해적질과 노략질로 중국 사람들을 잡아온 것은 아니니 놀라지는 마시라. 낡은 흑백사진처럼 꽤 오래된 사연은 이렇다.19세기 말, 당시 조선을 두고 일본과 청나라가 군침을 흘리며 힘겨루기를 한다. 청나라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오래전 어떤 분이 필자에게 소시오패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성도를 주의 깊게 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제의 성도가 종종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소시오패스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이 성도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하는지 궁금해 하며 상담을 나누었다.많은 이들이 ‘반사회적 성격장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지만, 그 아래의 단계인 ‘소시오패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단지 성격 이상쯤으로 생각한다.그렇다면 소시오패스(sociopath)란 무엇인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며,
‘덕분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오늘도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라고 고백한다,일본 마쓰시다기업 창업주이자 ‘경영의 귀재’로 불렸던 마쓰시다 고노스께는 94살까지 살면서 수많은 성공신화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비결이 한 마디로 ‘덕분에’에 있었다고 말했다. 먼저 그는 조실부모한 ‘덕분에’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20살이 넘어야 철이 들 것인데, 자신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우리는 순간순간 감정이 격해질 때가 있다. 일명 ‘욱’하는 성질이다. 로널드 포터에 프론은 라는 저서에서 행복하고 싶으면 분노를 조절하라고 말한다. 문제는 욱하는 성질을 죽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욱하는 증상은 대부분 자신이 무시당할 때, 괴롭힘을 당할 때 나온다.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가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면 ‘뭐 그런 일에 화를 내나’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 ‘억울해도 참아야 산다’ 등의 말로 최대한 자제하도록 학습시킨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평소 가정과 학교, 직장 등에서 어떻게 배출해야 할지 모르다
2019년 1월 22일 밤 자정이 지나고, 23일 새벽 3시 20분에 이르는 시간은 내 생애에 가장 고요하고, 어둠에 묻힌 밤이었다. 42년 동안 반려자로 함께 살아온 아내(신영승·64세)가 하나님나라로 부름 받았다. 조용한 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아내는 지난 40여 년간 나의 내조자로, 아니 동역자로 헤아릴 수 없는 고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신앙의 동지였다. 오직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며 자신의 육신을 돌볼 여유도 없었다. 지난 13년 동안 당뇨합병증으로 한 눈이 멀고, 신장투석을 받으
어느 땅이든 별명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티벳은 히말라야의 바람이 사시사철 불면서 ‘바람의 땅’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캄차카는 화산들이 지금도 연기를 뿜고 활동하면서 ‘불의 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초량엔 무슨 이름 하나를 갖다 붙이면 좋을까? 필자 생각에는 ‘골목의 땅’이 잘 어울리겠다. 골목이 없는 데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초량에는 마치 실핏줄처럼 골목들이 이어져있다. 골목이라는 실핏줄로 사람들이 흘러 다니면서 초량이라는 몸뚱이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지내왔던 것이다.‘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라는
"지금은 교회에 안 나가지만 과거에는 저도 믿음이 좋았습니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지금 믿음의 길을 걷지 않고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한 번 은혜의 비췸을 받았고, 성령의 은사에 참여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에 감동했다 할지라도 지금은 떠나있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타락한 자로서 회개조차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 6장 4~6절에 경고하고 있습니다.소시적에는 성탄절 성극도 했고, 청년회장을 역임했었노라 자랑해도 현재 믿음 바깥에 있다면 주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오로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인터넷의 발달로 각종 정보의 습득이 용이해졌다. 모든 영역에서 지식과 정보 공유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인류의 문화와 지식활동이 증가했다. 하지만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도 생겨났다. 바로 인터넷 중독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얽매이는 중독현상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인터넷 중독에 빠질까? 첫째로, 사회 환경적 요인이 있다. 많은 학생들이 입시의 중압감과 지나친 경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오프라인 공간상에서 자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인
팔순이 넘으신 은퇴 권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초량에서 근 육십년 이상을 사셨다. 결혼해 초량에 와서 지금까지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모진 풍상에서도 잘 견디시면서, 이제는 아름답게 늙어가고 계신다. 권사님은 주일학교가 위축되는 것에 안타까움이 참 많으시다.권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사오십년 전에는 초량에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저 윗동네에서부터 새까맣게 몰려 내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논물에 헤엄치는 올챙이 떼 같았다고 한다. 이 골목 저 골목마다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이며, 떠들고 다니던 소리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장 3~4절)2018년 12월 31일 깊은 밤. 온 국민이 소망의 2019년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해서 방방곡곡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동터오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새해의 소망을 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은 그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소원을 간구하는 은혜를 덧입었다.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 생명을 창조하시기전 빛을 지으셨다는
엄마만 의지하는 아이를 ‘마마보이’라고 부른다. 엄마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일종의 불안이다. 이처럼 유아들이 주 애착대상(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등) 혹은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은 성장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아동이나 청소년이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불안해서 유치원이나 학교 가기를 거부하고, 집을 나설 때마다 울고 떼를 쓴다면 부모에게 여간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이런 사람에게는 학업이나 또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터줏대감’이라는 말이 있다, ‘터’는 마을이나 공간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고, ‘주(主)’는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대감은 옛날 높으신 대감마님을 뜻한다. 결국 터줏대감은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초량에는 터줏대감이 사람이 아니라 놀랍게도 나무인데 이름 하여 ‘귀신나무’다. 귀하게 대접받는 몸이다. 나이도 워낙 오래 되어서 이 나무보다 더 오래 초량에 살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앞으로도 주민등록 앞자리 번호가 19세기 말쯤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아니면 ‘대감’자리를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
한 성도가 홀로 사시는 아버지 때문에 상담을 요청했다. 아버지는 70대 초반인데 가끔 친정에 가면 수많은 물건들을 모아놓아 집안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일거리로 폐지를 줍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갈수록 오래된 신문과 잡지와 교회의 주보, 부엌에는 밥그릇과 고철 등이 가득 찼다. 창고에는 낡은 옷이 가득해 입을 옷을 찾기도 어려워졌다. “아버지, 이게 뭐에요”라고 물으면 “신문들은 찬찬히 보고 스크랩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모아 둔 것이고, 오래된 물건들은 나중에 골동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