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목사의 초량이야기]

초량 차이나타운에 홍등이 가득 내걸렸다.
초량 차이나타운에 홍등이 가득 내걸렸다.

초량에는 차이나타운(China Town)이 있다. 말 그대로 중국거리요 중국마을이다. 거리 전체가 붉은색 꽃등과 붉은색 간판으로 덮여있고, 대부분 중화요리집들이다. 오전 열시가 조금 넘으면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여 늦은 저녁까지 열기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초량에 차이나타운이 있는가?’ 궁금해 한다. 우리가 해적질과 노략질로 중국 사람들을 잡아온 것은 아니니 놀라지는 마시라. 낡은 흑백사진처럼 꽤 오래된 사연은 이렇다.

19세기 말, 당시 조선을 두고 일본과 청나라가 군침을 흘리며 힘겨루기를 한다. 청나라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조선에 건너와서 부산까지 진출하는데, 자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청국영사관’을 세운다. 지번(地番)으로 초량동 571번지 일대다. 알고 보면 초량은 일찍이 국제적인 동네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화교(華僑)마을이 형성됐는데 ‘청관’이라고 불렀고, 이 일대를 ‘청관거리’라 불렀으니 지금의 차이나타운의 시작인 셈이다.

향토 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차이나타운 일대가 조성될 그 당시 초량은 ‘백사청송’(白沙靑松) 해변이었단다. 그런데 일제가 푸른 소나무가 우거지고 흰모래가 있었던 곳을 밀어내고 매립하여 땅을 만들었고, 거기에 힘겨루기를 하던 청나라 상인들이 자기 동네를 만들고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마치 일제는 뒷골목의 험상궂은 큰 깍두기 형님이요, 청나라는 작은 깍두기 ‘행님’이 되어서 조선 땅 초량을 자기 것처럼 동네 만들고 집짓고 살았던 것이다. 힘, 힘, 힘이 있어야 한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예나 지금이나 빼앗기고 설움 당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화요리집이 꽉 들어찬 차이나타운의 본격적인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청나라는 무너지고, 일본은 계속해서 기세를 떨쳤다. 그러던 중에 일제는 초량 앞바다 매축공사와 부산항 확장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마침 부러진 지팡이처럼 되어버린 청나라(중국) 땅에서 살기 어려워진 중국 사람들이 노동인력으로 부산에 오게 되는데, ‘산둥성(山東城)’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차이나타운 화교들의 호적(戶籍)이 대부분 산둥인 이유가 여기에 있고, 차이나타운 중화요리집의 주 메뉴가 ‘만두’인 까닭도 이것이다.

만두는 호떡과 함께 청나라의 대표적인 요리며, 산둥성의 상징적인 음식이기도 하였다. 함께 시작했던 ‘호떡’은 사라졌지만 만두는 잘 팔리고 있다. 차이나타운엔 짜장면과 짬뽕을 파는 가게도 있지만 만두가 주도한다.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간식이고 점심이지만 어쩌면 차이나타운 화교들에게는 ‘소울 푸드’(soul food) 같은 것이다.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자기들의 뿌리가 무엇이며, 자기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부터 시작된 역사의 질곡과 개인적인 아픔들을 잊지 않으려는 품목이 만두다. ‘원향제’ ‘장춘향’ ‘홍성방’ ‘신발원’ ‘일품향’ 등등 중국식 고풍스러운 간판 아래로 청나라의 만두가 익어가는 냄새가 차이나타운을 흐르면서 행인들의 침샘을 자극한다.

중국 사람을 ‘비단장사 왕서방’으로 비유하곤 한다. 장사 속이 밝아서 돈을 잘 번다는 의미일 것이다. 차이나타운엔 ‘만두장사 왕서방’들이 많다. 맛도 있고 각처에서 찾아오는 단골도 상당하다.

오늘도 왕서방의 만두가게는 주문 받기에 바쁘다. 왕서방의 주머니에 사임당이 도안된 한국 지폐가 두둑해진다. ‘사드’ 배치를 놓고 중국이 보여준 태도 때문에 두둑한 왕서방의 주머니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백여 년 전에 먹고살려고 낯선 땅 조선의 초량 앞바다를 매축하는 노동자로 건너왔다는 역사를 알고 나면, 옛날 사우디와 리비아 사막에 일하러 갔던 우리들의 큰 형님과 독일 탄광에 석탄 캐러 갔던 우리들의 삼촌이 떠오른다. 초량 속의 중국, 차이나타운에는 오늘도 청나라 만두로 배부른 한국 사람의 행복과 주머니가 배부른 왕서방의 행복이 공존하면서 하루가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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