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목사의 초량이야기]

팔순이 넘으신 은퇴 권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초량에서 근 육십년 이상을 사셨다. 결혼해 초량에 와서 지금까지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모진 풍상에서도 잘 견디시면서, 이제는 아름답게 늙어가고 계신다. 권사님은 주일학교가 위축되는 것에 안타까움이 참 많으시다.

권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사오십년 전에는 초량에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저 윗동네에서부터 새까맣게 몰려 내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논물에 헤엄치는 올챙이 떼 같았다고 한다. 이 골목 저 골목마다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이며, 떠들고 다니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하신다.

그 새까만 올챙이들 가운데 가수 나훈아도 있었고, 잘나가는 이경규도 있었고, 유명한 음악감독인 박칼린도 있었다. 초량교회 바로 앞에 초량초등학교가 있다. 교회와 학교 사이의 골목이 부산시에서 야심차게 만든 ‘이바구골목’이다. 여기 담벼락에 초량초등학교 출신인 나훈아와 이경규, 그리고 박칼린의 사진과 이야기가 액자로 만들어져 붙어있다.

이들과 동창생으로 같은 시대에 학교를 다녔다는 교회 집사님은 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그땐 자기 반에 아이들이 칠십 명이 넘었고, 한 학년이 열 두 반이나 되었다고. 골목에도, 거리에도, 학교에도 아이들은 새까맣게 많았다. 덕분에 우리교회 주일학교도 그 시절에 얼마나 아이들이 많았던지, 곰 인형 탈을 뒤집어쓰고 큰 북치면서 전도하러 나가면 교회가 비좁을 정도로 모여들었었다. 그런데 너무 맘이 아픈 것은 이런 이야기들이 ‘과거형’이 되어버렸다는 현실이다. 으스스한 호러영화 장면처럼 초량 골목과 거리에 까까머리 아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학교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웃는 소리와 노는 소리가 아직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의 원도심에서 살아가고 있는 초량의 아이들, 우리 동네 아이들이자 우리나라의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나훈아, 이경규처럼 까만 까까머리가 아닌 금빛 머리칼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말도 잘 한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한국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아이다. ‘블라디미르’도 있고 ‘소냐’도 있다. 특히 초량에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 러시아어권에서 온 다문화 가족이 많이 산다.

이유는 이렇다. 초량에서 부산역 쪽으로 가면 ‘텍사스 거리’가 있다. 그 옛날 미국 항공모함과 군함들이 들어오면 미군들이 잠시 내려 자유로운 시간들을 가졌는데, 그들을 위해 특화된 거리라고 보면 된다. 나이트클럽과 경양식집, 한때 인기가 좋았던 국산 가죽점퍼와 담요, 옷과 가방들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미군은 뜸해지고, 이제는 러시아 보따리상과 나름 자유분방한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거리를 접수한 형국이다. 이 사람들의 주거지가 거의 초량이고,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 블라디미르와 소냐와 같은 아이들이 동네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어떤 분이 월간지에 ‘아브라함도 알고 보면 타국에서 건너온 다문화 출신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잘 받아줘야 하며 편협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글쓴이의 큰 믿음 앞에 그렇게 잘 되지 않는 내가 참 부끄러워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안에 있는 의식의 DNA 가운데 ‘민족’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주 강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라는 말과 ‘우리민족’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기도할 때도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지켜 달라’고 기도한다. 오래전에 깊이 각인된 ‘우리민족’이라는 단어 앞에, 한국말을 하는 금빛 머리칼의 아이 ‘블라디미르’는 많이 헛갈리고 인식의 불편함을 불러온다. ‘블라디미르야, 미안해!’

오늘도 블라디미르는 또렷한 한국말로 교회 앞 낡은 문방구에 들어가서 군것질을 한다. 분명히 블라디미르는 비어가는 초량을 채워주고 지탱해내는 우리의 귀한 녀석이다. 나중에 육군병장 블라디미르가 지키는 하늘 아래서 우리는 눕고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해서는 안 될 망상이지만 어쩌면 블라디미르는 몇 십 년 뒤 우리나라에 갈등의 단초가 될 수도 있으며, 지금 한국교회가 정확하게 풀어내야할 사랑의 숙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혜로운 답을 찾아야 하며, 또한 그 답을 기꺼이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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