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동네 옛 백제병원에서 우리 초량교회 앞을 지나 168계단 끄트머리까지가 이른 바 ‘이바구골목’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골목이다.

‘이바구’란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다. 그러니 이야기 골목인 셈이고, 그 이바구란 다름 아닌 오랜 시간 속에 녹아있는 초량 사람들의 인생과 애환에 대한 이바구다. 골목이 추억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이유는 오랜 세월에 녹아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곧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다. 초량 이바구골목에는 그러한 삶의 이야기들이 습한 담벼락의 이끼처럼 끼어서 자라고 있다.

청마(靑馬) 유치환도 그 중에 하나다. 유치환은 1934년에 초량동 100번지로 이사 왔다. 그의 아내는 삼일유치원의 보모로 일했는데, 삼일유치원은 우리 초량교회가 운영한 유치원이었다. 3·1운동의 정신을 담아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이바구골목의 끄트머리 지점에는 유치환의 곤란했고 가슴 아팠던 사랑의 사연을 담은 ‘유치환 우체통’이 있으며, 초량교회 옆에 있는 이바구골목 담장갤러리에도 유치환의 사진과 <바위>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붙어 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고등학교 1학년 때 등단하여 31살에 요절한 천재 시인 김민부도 초량 이바구골목에 녹아있는 이야기의 한 페이지를 담당한 인물이다. 김민부는 초량 옆 동네인 수정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초량에 있는 부산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김민부의 흔적 역시도 흑백사진과 함께 대표적인 시 한편으로 골목 갤러리에 걸려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초량 이바구길은 긴 세월 묵묵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여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해야 한다.
초량 이바구길은 긴 세월 묵묵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여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해야 한다.

이바구골목의 난코스인 168계단 옆 어디쯤 전망대가 하나 있는데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름 하여 ‘김민부 전망대’다. 그가 노래했던 일출봉과 월출봉은 아니지만, 해와 달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김민부가 기다렸던 ‘님’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전망대에서 이 가곡을 흥얼거리면서 부산 앞바다를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의 슬픈 눈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님’은 또 누구일까? 골목에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가슴 타 들어가는 기다림과 애환이 녹아있다.

그리고 초량 이바구골목 갤러리에는 가난한 자를 위해 평생 헌신의 삶을 살았던 의사 장기려, 여성으로서 당시에 야당 당수까지 지낸 박순천 여사, 독립운동가 장건상, 폭탄을 던져서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순국한 26살의 독립투사 박재혁, 그리고 초량초등학교 졸업생인 가수 나훈아와 개그맨 이경규의 흔적까지 다 같이 녹아있다.

누구 한 사람의 골목이 아니라 모두의 골목이었다. 개인의 골목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과 함께 한 골목이었다. 단지 집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라 시간이 담겨있고 이야기가 녹아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바구골목은 묘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골목이 된 것이다.

누군가 책에서 ‘낡은 골목이 아름다운 이유는 시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쓴 적이 있다. 이바구골목은 좁아터진 집들과 담벼락, 오래된 우물터과 아찔하게 높은 168계단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솔직히 하나씩 따로 떼놓고 보면 뭐가 아름답겠는가? 시간의 손때가 묻으면서 귀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도시가 매력적인 데는 높은 첨탑도 한 몫 하지만, 시간이 만든 이야기가 녹아있는 오랜 골목들이 더 큰 역할을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골목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어쩌면 초량 이바구골목은 선생이다.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무언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다. ‘낡은 골목이 왜 아름다운지를 생각해보라’고.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은 요란한 개발이 아니라 결국은 묵묵한 시간이 만든다. 우리 인생에도 종국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도 골목처럼 인내하고, 골목처럼 감내해야 한다. 기쁘고 슬픈 모든 이야기를 녹여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오늘의 초량 이바구골목을 만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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