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북부 복음화 이끌며 빛나는 생명력으로 장식한 한 세기

미국북장로교 안동선교부가 이룬 토대 위에서 1921년 경북노회로부터 분립
주일학교 진흥과 CE창설 앞장서며 한국교회 다음세대 양성에 눈부신 공헌
3·1만세운동과 농촌운동 등에 힘써 민족사에 자랑스러운 흔적을 새겨놓기도

1906년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는 경북 안동에 선교지부를 설치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이미 경북에는 1896년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를 통해 대구에 선교지부가 설치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경북의 남쪽에 치우쳐 있는 대구에서 북부지역까지 담당하기에는 거리도 상당했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의 교세 또한 크게 확장되는 추세에 있었기에 경북 북부의 중심지인 안동에 새로운 선교부를 세우자는 것은 꽤 설득력 있는 제안이었다.

경안노회의 토대를 구축한 미국북장로교 안동선교부의 개척자 오월번 선교사.
경안노회의 토대를 구축한 미국북장로교 안동선교부의 개척자 오월번 선교사.

예로부터 경북 북부는 유교문화가 크게 융성한 지역이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론이 크게 기세를 떨쳤던 것도 이 지역 유생들의 영향력이 발휘된 이유가 크다. 하지만 일제의 야욕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조선 왕조의 모습을 목도하고, 이를 막아보고자 일으킨 의병들의 항쟁까지 수포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점점 커져갔다.

마침 이 무렵 대구에 거점을 둔 서양선교사들의 사역범위가 점차 넓어지면서 경북 북부에도 기독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대구선교부의 새로운 책임자였던 제임스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가 1902년 3월 조사 김재수와 함께 안동과 인근 지역을 방문해 복음을 전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윌리엄 바레트(한국명 방위렴) 등 여러 선교사들의 전도여행 발길이 경북 북부로 이어졌다.

<경안노회 100년사>(킹덤북스)에 수록된 경안노회 설립 초창기의 지도자들 모습.
<경안노회 100년사>(킹덤북스)에 수록된 경안노회 설립 초창기의 지도자들 모습.

그런데 초창기 경북 북부 장로교회들의 설립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경안노회 100년사>(킹덤북스)를 집필한 임희국 명예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의 설명이다.

1959년 10월 3일 거행된 경안노회 선교 50주년 기념식.
1959년 10월 3일 거행된 경안노회 선교 50주년 기념식.

“1902년 이래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는 토착 신앙인들이 교회를 설립하거나 설립을 주도했다. 매우 활발하고도 광범위하게 교회설립이 진행됐다. 이 점을 대구지부 선교사들이 상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3년에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7개 마을에 개신교(장로교회) 교인이 12명이었다…1908년에는 교인이 1000명을 넘었다. 1906년과 1908년 사이에 교인 수와 교회 설립이 크게 늘어났다.”(<경안노회 100년사>, p.71)

바로 이 시기에 의성 비봉동교회, 풍산 하리교회, 안동 국곡교회를 비롯한 수십 개 교회들이 경북 북부 전역에 세워졌다. 권수백 김인옥 김성삼 등이 이 과정에서 맹활약한 한국인 성도들이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는 더 이상 결정을 늦출 이유가 없었다. 마침내 1908년 안동 선교지부 설립이 결정됐다.

아더 웰번(한국명 오월번) 아치볼드 플레처(한국명 별리추)와 조사 김영옥 등이 1909년 안동으로 파견돼 선교부지 매입과 주택 건립이 시작됐고, 건물 완공과 함께 존 크로더스(한국명 권찬영) 에드윈 레니크(한국명 연위득) 등 선교사들이 가족을 이끌고 속속 안동으로 부임했다.

안동교회에 세워진 기독청년면려운동(CE) 발상지 기념비.
안동교회에 세워진 기독청년면려운동(CE) 발상지 기념비.

안동선교부의 활동을 통해 경북 북부의 장로교회 교세는 더욱 크게 확대됐다. 특히 선교사들이 인도하는 성경공부반을 통해 많은 이들이 회심하며 교회가 세워졌다. 학문에 대한 열의가 유난히 높았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성경공부반을 씨앗으로 삼아 수많은 ‘성경장로교회’와 기독사립학교 설립이라는 열매를 거뒀다. 안동에는 의료선교 기지인 성소병원도 건립됐다.

탄탄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경북 북부의 교회들은 복음사역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었다. 빼앗긴 겨레의 국권을 회복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이 지역 장로교회들은 기꺼이 봉기의 선두에 섰다. 강정구의 ‘경상북도 북부지역 3·1만세운동’ 조사에 따르면 당시 경북지역 93개 장로교회 중 만세시위에 참여한 교회가 영덕 송천교회를 비롯해 무려 42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만세운동의 산물로 여러 유생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가 하면, 안동 섬촌교회 설립이라는 결실까지 낳았다.

영덕 송천교회를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 장로교회들이 앞장선 영해3·1운동 기념탑.
영덕 송천교회를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 장로교회들이 앞장선 영해3·1운동 기념탑.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21년 경북 북부의 장로교회들은 경안노회를 결성하게 된다. 앞서 1911년 조직된 경상노회, 뒤이어 1916년 경상노회에서 분립한 경북노회에 속해있던 이 지역교회들은 이미 충분한 교세를 갖추고 독자적인 노회를 꾸려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10회 총회의 결의로 경북노회에서 분립이 허락된 경안노회는 1921년 12월 20일 안동여자성경학당에서 조직회로 회집한다. 당시 조직회 회장은 권찬영 선교사였다. 이 자리에는 선교사 2명, 목사 3명, 장로 12명 등 총 17명의 회원이 참석해 노회장 김영옥 목사와 서기 강석진 목사 등을 선출해 초대 임원진을 구성한다. 이와 함께 15개 산하 위원회를 구성하고, 총회전도국에서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선정한 이대영 목사의 파송을 허락한다. 이듬해 1월 18일에는 안동교회에서 첫 정기회가 열렸다.

조직 이후 경안노회는 특히 교육과 다음세대 양성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다. 노회 산하 주일학교협의회가 조직되면서 주일학교 진흥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1922년 순직한 로저 윈(한국명 인노절) 선교사를 기리는 인노절기념성경학교를 통해 많은 성도들이 교회 지도자들로 자라났다.

태풍 피해를 입은 원황중앙교회 복구에 한마음이 된 경안노회원들.
태풍 피해를 입은 원황중앙교회 복구에 한마음이 된 경안노회원들.

1924년에는 경안중학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1921년에는 월리스 앤더슨(한국명 안대선) 선교사의 주도로 안동읍교회에서 기독청년면려회(CE)를 창립해 기독교청년운동의 새 물결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8년 노회 산하에 농촌부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안농원을 운영하며 농사강습회 등을 실시해 민족경제를 다시 살리는 일에 힘썼다.

빛나는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는 경안노회는 물론 총회 산하 전국교회의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이후 경안노회는 1942년 12월 제38회 정기회를 끝으로 폐지됐고, 해방 후인 1945년 11월 20일이 돼서야 안동교회에서 복구회를 통해 회복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장로교단의 잇단 분열이라는 격랑 속에서 경안노회 또한 여러 차례 분열의 아픔을 겪었지만, 그 명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경안노회는 안동 영양 청송 영덕 울진 등 경북 북동부지역을 권역으로 삼고, 63개 교회 23당회가 소속돼 복음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6일 영양교회에서 열린 경안노회 100주년 기념식.
지난해 12월 6일 영양교회에서 열린 경안노회 100주년 기념식.

지난해 12월 6일에는 영양교회에서 ‘은혜의 100년, 화합의 100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노회 설립 100주년 감사예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노회장 박상렬 목사를 비롯한 전체 노회원들과 부총회장 오정호 목사, 총회총무 고영기 목사 등 하객들이 자리를 같이하며 믿음의 선배들이 이어 온 소중한 역사를 계승할 것을 다짐했다.

특히 이날 감사예배에서는 1905년 설립된 영양 오리교회,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10호로 지정된 영덕 송천교회, 증경노회장 최병태 임종구 조성일 목사, 30년 이상 근속한 김진수 박병석 목사, 국내외에 여섯 교회를 개척한 김쌍금 전도사, 영덕지역 만세운동을 선양한 장중권 장로 등에게 기념패가 증정됐다.

올 봄 제130회 정기회를 앞두고 있는 경안노회는 100주년을 기념한 자체 역사집 발간과 함께 선교사업과 장학사업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지난해에는 태풍 피해를 당한 원황중앙교회를 위해 노회장을 비롯한 노회원들 대부분이 복구 작업에 함께 팔을 걷어 붙이며 진한 형제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박상렬 노회장은 “100년의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영욕의 시간들이 교차했지만 경안노회의 저력은 여전하다”면서 “총회와 지역교회들을 더 충실히 섬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모습을 지켜나가는 노회가 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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