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은 삶과 동행한다 1738년 7월 24일 앨더스게이트 스트릿(Aldersgate Street)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중생이니 회심이니 하면서 구원의 확신과 결부시켜 강조하는 교파나 교회가 있다는 것을 듣고 있다.구원의 확신은 일반적으로 아는 진리와 다를 때가 있다. 확신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지만 의무이다. 의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미신에 빠지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지도자는 늘 유의해야 한다.‘견인’에 이어 ‘확신’에 대한 교리는 선택된 자들의 삶에 상당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행해야 하는 큰 임무이다(
보호하시는 약속은 불변하다 그리스도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습관을 가지셨다. 그분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셨다. 특별히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의 내용을 자세히 읽을 수 있다. 그 내용은 사랑하는 제자들, 선택된 자들 그리고 세상을 위한 기도였다. 지금도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어떻게 행하시는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내용이다. 그분이 육신적으로 떠나는 것은 제자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승천한 후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가거나 유대인들의 시선을 피해 갈릴리로 가곤 했다. “내
자랑하지 말고 영광 위해 행하라 어릴 때 “천국에도 상급이 있다”는 말에 대해 어떤 이는 겨우 구원을 얻고, 또 어떤 이는 화려한 면류관을 얻는 반면 다른 이는 개털 모자를 받을 것이라는 부흥사들의 말이 기억난다. 우스꽝스런 질문이지만 과연 그럴까? 하늘에도 상급이 있다고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사도 바울 역시 경주에 비교한 것처럼(고전 9:24), 상을 받는 자는 한 사람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칼빈은 3권 11~18장까지 ‘이신칭의’를 설명하고 있다. 11~14장은 이신칭의에 대한 성질을 설
진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회개하면서 큰 위로를 얻는다. 교리에서 기독교인이 위로를 얻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①자신의 죄와 비참함의 심각성을 깨달을 때이고, ②그때 구원 또는 구조 받는 길을 깨달을 때이고, ③그 깨달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때이다( 1째 주간 2문). 한 마디로 ‘회개’할 때이다.회개의 심리적 효과 때문에 위로를 얻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회개의 두 번째 측면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 다뤘던 회개에는 양면성이 있는데 하나는 죄 죽이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성과 평생 싸우다 “그릇된 행동을 회개했는데 또 반복해서 그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회개한 죄는 정말 용서받는 겁니까?”흔히들 묻는 질문이다. 또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죄들이 용서되었는데 반복해서 왜 우리가 회개해야 하나요?” “지워진 죄들인데 자꾸 가책을 왜 느껴야 하나요?” 이렇게 죄 용서에 대한 개념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 내리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를 내릴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 어떤 이는 미신이나 굿을 하는 것처럼 종이에 써서 불에 태우곤 한다. 정말이지 안타깝다.회개에 대한 바른 이해는가 필요합니다.⑴ 성군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실천하다 어릴 적부터 즐겨 외웠고, 노래로도 불렀던 성경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여기서 ‘독생자’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 어떤 이는 엄지손가락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럴까? 혹자는 말할 것이다.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의 외아들이지!” 진의를 파악하지 않은 채 무심코 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33문을 읽으면서 나는 눈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다 종교개혁사를 쓰면서 부제로 ‘진리의 재발견’이라고 붙인 적이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청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교회의 부패의 고리를 풀려고 무수한 순교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했던가? 성경에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항상 타락했다. 종교개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칭의’를 주장하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즉 스콜라주의자들은 당황했다. 그것의 의미를 몰랐을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3솔라(3solas)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또 이 믿음이 겨자씨만큼 하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마 17:20).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는 말씀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17).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신비한 믿음을 선물로 주시다 “불신자가 어떻게 복음을 수용하여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관심을 가질 질문이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은 요한복음 3장이고, 이곳에서 예수님을 은밀하게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담고 있다. 중생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할 단어는 ‘성령’, ‘다시 태어남’, 그리고 ‘알지 못함(바람)’ 등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많은 개종의 역사가 기술되고 있지만 보다 분명하고 완전하게 서술된 내용은 역시 교리들을 통해 밝히 알 수 있다.중생에 관해 가장 잘 서술된 곳은 아르미
선택된 백성의 놀라운 위로와 혜택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지난주에 살폈던 ‘그리스도의 3중직’에 이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다. 이것을 간략하게 ‘비하(卑下·Humiliation)’와 ‘승귀(昇貴·Exaltation)’라 표현한다.이 주제 역시 ‘3중직’처럼 중보자 사역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웨스트민스터 기준은 3중직 다음 순으로 비하와 승귀를 설명하고 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란 용어는 웨스트민스터 기준에만 사용되는 단어이다. 칼빈의 역시 2권 15장에서 3중직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시다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분이 ‘중보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중보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중보자이심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의 중보자이심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은 인성을 입으셔야만 했다. 그분의 인성으로 우리는 그분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성삼위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을 감히 측량할 수 없지만,
화해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논쟁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삼위일체’였다. 4세기에 개최된 두 차례의 범종교회의(325년, 381년) 이래 더 이상 발전되지 않고 있다. 그 다음으로 다뤄진 논쟁은 ‘단성론’이다. 단성론이란 기독론(Christology)에서 핵심적 주제이며, 삼위일체론 다음으로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이 논쟁은 세 차례(381년, 431년, 451년)에 걸쳐 일어났다. 그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든 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우
구속사역의 중추적 역할하다 ‘중보자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지금까지 설명한 구원의 진리들과 앞으로 전개될 진리들과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이 주제 하나만 두고 보면, 누구든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간의 중보자는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진리이다(딤전 2:5). 하지만 어느 진리와도 맥을 같이 해야 하고, 항상 관련성을 가져야하기 때문에 모든 교리를 서로 연결시키거나 관련을 맺는 맥을 잡지 못하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을 뿐더러 성경 해석에 도움도 되지 못한다.⑴‘중보자 그리스도’는 교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성을 설
타락의 선택 대가 지불하시다 개혁신앙에서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은 인간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4세기 삼위일체 논쟁에 이어, 5세기에 교회 역사에 있었던 뜨거운 주제는 단성론, 즉 그리스도론 논쟁이었다. 이와 함께 ‘은혜론 논쟁’의 주제였던 자유의지도 뜨거운 감자였다. 이단자 펠라기우스가 억지 주장한 것에 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의 20년에 걸쳐 반박하였다. 여기서 드러난 자유의지에 관한 설명은 종교개혁 시기에 마르틴 루터에게서 다시금 점화되었고, 17세기 초에는 개혁교회 내에서 일어난 아르미니우스파 논쟁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과 생명 구속사적 또는 언약 신학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분석하는데 그치는 언약 개념이 아니라 구속 사역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성례와도 관련을 지어 해석되어야하기 때문이다.⑴언약에 대한 오해. 흔히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알고 있다. 타락 후의 상태에서 두 언약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는 타락전과 후의 상태에서 각각 주셨다. 타락 전의 인간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율법이라 할 수 있는 명령이 곧 ‘언약’, 즉 행위언약이다. 그것은 금지된 실과를 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