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자신의 죄성과 평생 싸우다

 

“그릇된 행동을 회개했는데 또 반복해서 그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회개한 죄는 정말 용서받는 겁니까?”

흔히들 묻는 질문이다. 또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죄들이 용서되었는데 반복해서 왜 우리가 회개해야 하나요?” “지워진 죄들인데 자꾸 가책을 왜 느껴야 하나요?” 이렇게 죄 용서에 대한 개념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 내리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를 내릴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 어떤 이는 미신이나 굿을 하는 것처럼 종이에 써서 불에 태우곤 한다. 정말이지 안타깝다.
회개에 대한 바른 이해는가 필요합니다.

⑴ 성군으로 불리는 다윗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 그의 시편에서 ‘용서’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만나볼 수 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여기서 다윗은 용서받는다는 용어를 “가려진”이란 단어와 나란히 사용한다. 덮인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들이 코팅이 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보지 않도록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글쎄? 성경에서 보혈을 언급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의 형태의 총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6항 참고). 그리스도의 보혈은 씻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대표적인 표현이다(요일 4:9 참고).

아무튼 죄 용서는 가려졌다 또는 덮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죄인으로 결코 여기지 않는다!

⑵ 그런데 우리가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서를 받기 위함이나 죄들을 지워버리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회개로 말미암아 죄인은 위험에 대한 통찰력과 깨달음만 아니라, 거룩한 본성과 하나님의 의로운 법과는 상반되는 자신의 죄들의 더러움과 가증함에 대한 통찰력과 깨달음을 갖게 된다”(15장 2항)고 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비함 또는 사랑을 깨닫게 된다.

회개는 결코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또는 죄 용서의 어떤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서도 안 된다”(15장 3항). 그렇다. 심리적인 무슨 효과를 발하기 위해 애통하는 형태는 로마 가톨릭의 형태이다. 용서를 받았다고 착각을 갖게 한다. 로마 가톨릭은 회개를 3가지 형태로 말하고 있는데 ①구술해야하고, ②애통해야하고, 그리고 ③보속 또는 만족해야 한다고 억지 주장을 편다. 이 일을 위해 그들은 고해성사를 만들었고, 통곡의 시간을 만들고, 보속 또는 만족을 위해 재물과 선행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죄들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회개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이 죄인임을 참으로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자비함을 깨닫게 되므로 자신의 죄들을 슬퍼하고 증오하는 뜻이 있다. 따라서 죄로부터 떠나 새로운 삶을 사는데 노력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87문,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담서> 76문). 간단히 말하면 회개의 두 요소가 있다고 보면 된다. “하나는 죄 죽이기 또는 난행고행이고, 다른 하나는 영 살리기”이다(<기독교강요> 3권 3장 3항). 방금 내린 정의는 이 두 요소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죄 죽이기란? 좀 끔찍한 표현이기도 하다. 청교도가 성경적 표현으로 하면, ‘자기부인’이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죄 죽이기’라는 용어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멜랑히톤이 먼저 사용한 것이지만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도 자주 사용한다. 회개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하는 한 측면은 덮여진 죄성과 싸우는 것이다. 회개의 7가지 측면에 대해 읽어보면 이 부분이 좀 더 자세히 그려질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어떤가? 진정한 회개의 한 가지 요소인 ‘죄 죽이기’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이지 않는가? 진정한 회개의 한 측면은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고, 내려놓는 것이고, 부인하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본체를 비워 인성을 입으시면서 고통을 당한 것을 본을 삼아야 한다. 이것을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비교하고 있는데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이다. 평생을 통한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것은 참되고 정상적인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거룩한 삶, 즉 성화를 행하게 된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라는 표현에서 ‘죄 죽이기’를 엿볼 수 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심연의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지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말씀은 날쌘 검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죄 죽이기’를 가능토록 한다(히 4:1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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