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구원의 확신은 삶과 동행한다

 

1738년 7월 24일 앨더스게이트 스트릿(Aldersgate Street)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중생이니 회심이니 하면서 구원의 확신과 결부시켜 강조하는 교파나 교회가 있다는 것을 듣고 있다.

구원의 확신은 일반적으로 아는 진리와 다를 때가 있다. 확신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지만 의무이다. 의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미신에 빠지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지도자는 늘 유의해야 한다.

‘견인’에 이어 ‘확신’에 대한 교리는 선택된 자들의 삶에 상당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행해야 하는 큰 임무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3항). 확신이란 임무를 갖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구원의 확신 정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자녀, 죄 용서, 칭의 및 양자로 말미암아 얻어진 확신이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36문).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것, 그분의 사랑으로 죄 용서가 이뤄졌다는 것,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에게 전가되었다는 것,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흔히들 천국행을 탔다는 감정이나 의지적 확신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틀린 정의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란 구원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함유하고 있어야 하고, 삶에서 갖게 되는 증거이다. 이러한 증거는 인간이 선행을 행해서 갖는 것일 수 있지만, 그 선행 역시 그분이 역사하신 것이기에 그것으로 자만, 자랑 또는 만족에 빠져선 결코 안 된다.

확신의 방법

확신은 인간이 가공해 낸 억측이나 신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약속들에 대한 믿음과 자녀임을 증거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80문). 의문 나는 것을 물어서 이성으로 확신을 얻으려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는 이성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성이나 오성에 근거한다면, 유식하고 박식한 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일차적으로 말씀에 근거하기에 지식에 있다고 하지만, 지식의 동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체험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또 성령의 역사는 지성 또는 이성에 있지 않고 심정(heart)에 있다(<기독교강요> 3권 2장 36항). 믿음도 지성과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라 심정에 관련을 맺고 있다.

확신의 근거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특별한 계시가 요구되지 않는다. 맹신자들은 은사를 체험하여 그것에 확신의 근거를 두려고 한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것으로 자만에 빠져 엘리트 의식을 갖곤 한다. 그런 것이 지속되지 않으면 낙담에 빠지기도 한다. 말씀의 신뢰는 인간의 그 어떠한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다. 성령의 역사로 신뢰가 일어난다. 그 신뢰는 삶에서 증명된다.

확신의 드러남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 확신이기에 항상 유지하기 쉽지 않다. 삶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의심들과 싸워야 하고, 의지가 약해 여러 유혹에 빠져 죄들로 말미암아 번뇌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고, 드러난 업적으로 인해 자만에 빠지기도 한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선한 양심으로 걷고자 노력하기에 확신할 수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1항).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단어는 ‘선한 양심’이다. 믿음이 담긴 그릇은 선한 양심이다(<기독교강요> 3권 2장 12항). 이 양심이 바르지 못하면 믿음의 행위가 나오지 못한다. 말씀의 명령대로 누구든 행하지 못하는 것은 이 양심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확신의 결과

구원의 확신은 경건한 삶을 촉구한다. 자만보다 겸손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인간의 어떤 업적이나 스펙으로 구원을 받고 확신을 갖는다면 자만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항상 이 확신에 머무를 수 없고 죄를 범할 수 있거나 의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게 회개하며 두려움과 떨림의 삶을 산다(<돌드레히트 신조> 5장 12항). 또 구원의 확신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묵상하게 하기에 생명보다 더 달콤하다(<돌드레히트 신조> 5장 13항).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머물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볼 때는 성실한 자이고, 교회적으로 볼 때는 진실한 자이고, 영적으로 볼 때는 겸손한 자이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은 성화와 견인처럼 우리의 삶과 동행한다. 확신의 기쁨을 상실할 때는 슬프지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성장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해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절망과 좌절의 웅덩이에 빠졌을지라도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늘 친구처럼 곁에서 동행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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