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신비한 믿음을 선물로 주시다

 

“불신자가 어떻게 복음을 수용하여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관심을 가질 질문이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은 요한복음 3장이고, 이곳에서 예수님을 은밀하게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담고 있다. 중생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할 단어는 ‘성령’, ‘다시 태어남’, 그리고 ‘알지 못함(바람)’ 등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많은 개종의 역사가 기술되고 있지만 보다 분명하고 완전하게 서술된 내용은 역시 교리들을 통해 밝히 알 수 있다.

중생에 관해 가장 잘 서술된 곳은 아르미니우스파 논쟁에서 작성된 <돌드레히트 신조> 3~4장의 6~17항과 오류 5~9항이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이다. 간략하게 교육을 위해 알기 원하면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29~31문과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59~68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독교강요> 2권 3장의 설명이 단연 최고이다.

‘중생’. 흥분되는 단어이다. 놀라운 진리는 이것이다. 창세 전에 선택된 자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비밀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것을 이뤄 가신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분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믿음을 선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안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실제로 베푼 것이고, 스며들게 하시고, 그리고 주입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능력만을 베풀고 인간의 의지에서 믿고자 하는 동의나 믿는 행위를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선물이 아니다. 바라고 행하는 것을 역사하시는 분이 그분이시라는 의미에서 선물인 것이고(빌 2:13), 모든 것에 만사가 믿고자 하는 의지와 믿는 행위를 인간 안에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다”(<돌트레히트 신조> 3~4장 14항). 비밀스럽고 신비한 중생을 믿음으로 깨달을 수 있다. 구속 사역은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서 우리가 인식하게 되고, 그 시작은 영원한 선택이었고, 적용은 중생이다.

⑴외적 부르심-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죄성에 따라 살고 또한 제멋대로 산다. 그들 가운데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한 자들이 있다. 이들은 그분의 자녀로 불리게 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선택한 기준이 당사자에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한 기쁨과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이다(<돌드레히트 신조> 7항). 이 의미는 비밀적이고 어떤 조건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권 22장 1~2항). 그런데 선택된 자만 부름을 받지 않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부름을 받을 수 있다. “성령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체험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 진정으로 나아오지 않는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4항). 외적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은 생명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수용하지 않으며 세상의 염려와 쾌락으로 말씀의 씨앗을 시들게 하여 열매 맺지 않도록 한다(<돌드레히트 신조> 3~4장 9항).

⑵중생의 방법-중생을 다른 말로 ‘부르심’,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심’, ‘거듭남’이란 단어로 서술한다. 선택된 자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심을 갖도록 성령께서 복음으로 마음을 조명시킨다. “닫힌 심정을 여시고 강퍅한 심정을 부드럽게 하시고 의지에 새로운 재능을 스며들게 한다…반항적인 의지를 자발적이고 순종하는 의지로 만드신다”(<돌드레히트 신조> 11항). 한 마디로 의지의 전환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대한 지식으로 우리 마음을 계몽시킨다”고 한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30문). 우리의 마음을 계몽시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도록 이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⑶수동적-중생은 비밀적 그리고 불가해적이다. 인간의 어떤 행적이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중생에 있어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중생의 사실조차 당시에 깨닫지도 못한다. 인간의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인간 편에서 어떤 공로와 능력이 중생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르미니우스파는 “부패하고 본성적 인간은 일반 은혜를 너무나 잘 사용할 수 있거나 타락 후에도 은사들은 남아 있기에 잘 사용하여 더 큰 것, 즉 복음적이거나 구원하는 은혜와 구원 자체까지 점차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회심하게 되는 은혜는 친절한 충고뿐이다. 충고를 위해 일하는 이런 방법은 인간 회심에 가장 고귀한 방법이고 인간성과 가장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돌드레히트 신조> 3~4장 오류 6~7항). 그래서 아르미니우스파는 가공된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인간 스스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중생을 강조한다. 중생 날짜와 경험을 강조하면서 진리를 속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순전한 복음 사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선포하는 것만이 사역자가 하는 일이다. 일시적으로나 간헐적으로 각종 수단이나 고안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언제든 말씀을 듣고 읽고 지키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을 다녀도 그는 스스로 말씀을 읽고 삶에 실천하는 것이 부적절할 것이다. 또 겸손과 경건에 힘쓰지 않고 타락성에 따라 상처를 주는 기만적 삶을 지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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