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화해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논쟁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삼위일체’였다. 4세기에 개최된 두 차례의 범종교회의(325년, 381년) 이래 더 이상 발전되지 않고 있다. 그 다음으로 다뤄진 논쟁은 ‘단성론’이다. 단성론이란 기독론(Christology)에서 핵심적 주제이며, 삼위일체론 다음으로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이 논쟁은 세 차례(381년, 431년, 451년)에 걸쳐 일어났다. 그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든 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아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보도록 하자.

신성과 인성을 지닌 성자 하나님에 관한 논쟁은 ①두 본성이 어떤 관계로 연합되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②인간 구속에서 이 관계의 중요성이다. ③부가적인 질문으로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혜택을 주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주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두 본성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기독교강요> 2권 12~14장의 주제임).

1.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 하나?

중세 스콜라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셀무스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교회사에서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구속의 완전함 때문이다. 또 인간이 되셔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38~39문).

그리고 신성과 인성이셔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데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이 필연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2. 그러면 논쟁의 첫 번째 질문인 어떤 관계로 연합되었을까?

이 연합에 대한 그릇된 설명으로 아폴리나리스와 유티케스와 같은 이단은 381년과 451년에 각각 이단자로 정죄 받았다. 이 두 이단자는 신성이 인성을 지배하거나 융합하여 신성만 남아 있거나, 신성이 로고스를 대치했다고 하며 신성을 강조하는 단성론을 가졌다. 이것은 현재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갖는 이단성이 되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신성과 인성의 연합 관계를 위격적 결합으로 보아 뚜렷하게 구별하므로 인성을 강조하는 이단성을 갖은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자들도 있다. 이런 자들은 자유주의나 인간 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로 흐르기 쉽다.

3. 인간 구속에 있어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의 구속은 무의미하다.

완전하고 단번의 구속사역을 위해 신성이 요구되고, 인간의 처지를 이해하고 중보하시기 위해 인성이 요구된다. 완전하고 단번에 이뤄진 구속 사역이 아니라고 믿는 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처럼 항상 죄들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온갖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감성과 지성의 확신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다. 성찬 때에도 죄들의 용서의 확신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확신을 확인하는 것이고, 말씀대로 살려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완전하고 단번에 이뤄진 구속 사역을 신뢰하지 못하고 단성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자가 되고 만다.

4.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련된 논쟁이 우리 신앙에 어떤 유익과 혜택을 줄까?

①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이다. 그분은 자유주의자들이 억지 주장하는 도덕 선생이나 불신자들이 언급하는 성인들 중 한 명이나, 이슬람교와 같은 이단들이 억지 주장하는 선지자들 중 한 명이 결코 아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시라는 고백은 구원 교리에 필수적이다.

②기독교인의 삶의 균형을 알린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너무 신비적이지도 않고 너무 세속적이지도 않는 균형적 삶을 기독교인은 유지해야 한다.

천국 시민권과 지상 시민권의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 어려움을 직면할 때에는 하늘나라를 소망해야 하고, 좋은 일을 만날 때는 지상의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이단성을 갖게 되기에 어느 장소에서든 적절한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 사회에서 신자임을 자랑하거나 교회에서 사회의 신분을 자랑하는 것은 불균형적 신앙생활을 하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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