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하나님의 자녀’로 실천하다

 

어릴 적부터 즐겨 외웠고, 노래로도 불렀던 성경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여기서 ‘독생자’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 어떤 이는 엄지손가락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럴까? 혹자는 말할 것이다.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의 외아들이지!” 진의를 파악하지 않은 채 무심코 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33문을 읽으면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왜 그분을 하나님의 ‘독생자’라 부르나?” 왜 이런 질문을 할까? 답변은 이렇다. ‘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본성적 아들이기 때문이다(요 1:14, 18). 이에 반해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으로 인해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이다(롬 8:15~17; 엡 1:5~6; 요일 3:1).’ 어떤가? 이 답변이 이해되는 지 궁금하다.

교회 역사를 보면, 조금이라도 능력을 받거나 재능을 발휘하면 언제든 은사, 즉 카리스마를 받았다고 착각하여 인간 앞에서 자신의 자랑에 빠지는 자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대체적으로 이단자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또 황제들이나 군주들도 예외가 아니다. 스스로 반신반인이라 여긴다(<기독교강요> 1권 1장 2항).

심지어 성군이라 불리는 다윗 역시도 이 유혹에 빠진 적이 있었다. 태평성세를 누리던 다윗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고 싶었다. 그래서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삼상 24:2). 요압 장군은 만류했으나 그는 강권했다. 이에 대해 노한 하나님은 그의 범죄로 7만 명을 죽이셨다. 다윗은 만용을 부린 것이다. 이 결과를 접한 다윗은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며 진정으로 회개했다.

이제 ‘양자됨’이란 교리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파악하도록 해보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2장은 ‘양자됨’의 내용을 하나의 항으로 다루고 있다. 선택된 자는 비밀적 은혜로 내적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의 추한 내적 모습으로는 이 은혜를 도저히 감당치 못한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진리인 창세전 선택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그분의 자녀에 입적될 수 없다.

고백서는 말하기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분으로 인해’ 양자가 되었음을 명시한다. 이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가리켜 ‘양자의 영’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매우 다정다감한 용어다. 예수님은 기도의 방법을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명하라고 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또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는 분이다. 그리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이다. 이러한 분을 구약성경은 ‘선하신 분’이라 명한다. 선하심!

아버지의 자녀는 그분의 모든 특권을 누린다. 부름을 받은 우리 역시 그 특권을 누린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도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그분께 언제든 필요한 것을 간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처럼 방탕했더라도 그분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이 가책되어 멀리 있을 수 있지만, 그분은 언제든 기다리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분께 간구하게 하는 분을 특별히 ‘양자의 영’이라고 말한다. 물론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자격이나 공로와 무관하게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양자됨을 간과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비근한 실례로 탕자의 형이었다. 굳이 문자적으로 받아야할 것은 아니지만 진실로 회개한 자로 돌아온 탕자. 정말 미안해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탕자(눅 15:19).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자임을 고백하는 자는 아버지인 그분께 돌아온다. 당연한 아들로서의 모습은 없고, 감당치 못하고 비천함을 체험한 자의 모습 외에는 없다. 이 모습이 곧 중생한 자의 모습이다. 이와는 달리 아들로서 권리를 주장하진 않았지만 내적으로 감췄던 자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아들 됨을 알렸다. 탕자란 큰 아들이었지 작은 아들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양자됨’이란 입적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자이다. 이런 자를 ‘겸손한 자’ 또는 ‘청지기’라 부른다. 감당치 못하는 은혜로 살아감을 알고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이다. 우리가 누리는 혜택들은 너무나 많다. 우리의 의지와 경건이 탁월해서 누구처럼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은혜다. 누구처럼 나이 들어 온 국민 앞에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가진 어떠한 재능이 아니다. 오직 그분의 보호하심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가 진정한 양자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촛불처럼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런 자는 기도에 힘쓰고 바른 삶에 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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