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뒷담 넘어 3·1만세운동 현장에 가다오랜시간 학교서 갈고 닦은 애국심, 거리 시위서 표출하다 일본경찰에 잡혀가파른 층계 난간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겁 없는 소녀, 껑충한 키 때문에 누구보다 눈에 띄는데 학교 주변에 철따라 피는 오디 살구 등의 과실들을 따먹으러 나갔다가 들켜 꾸중 듣곤 하던 말썽꾸러기,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는 친구들과 잠자리에서 기도하다 느닷없이 ‘명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엉뚱한 마무리로 폭소를 자아내던 엉뚱한 매력의 소유자.이화학당 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이 대체적으로 기억하는 유관순의 학창시절 모습이
영명학교서 투철한 민족정신 가슴에 새기다사애리시 선교사 헌신적 보살핌과 후원 아래 애국신앙 기초 튼튼히 쌓아매봉자락에서 자란 유관순이 서울 이화학당에 입학하기까지의 시간들은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져있다. 사실 나라를 빼앗긴 민족, 그 중에서도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어린 소녀의 삶에 무슨 그리 대단한 사건들이 있었을까. 단 하나, 그가 고향 천안을 떠나 이웃 공주로 거처를 옮겨 영명여학교라는 이름의 미션스쿨에 다녔다는 증언만이 생생하다.공주의 감리교선교부에서 활동하던 엘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는 관할지
조국 독립 꿈꾸던 신앙의 땅서 올곧게 자라다일제 항거의 독립 신념 뚜렷했던 마을 … 시시비비 분명히 가리던 당찬 소녀‘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듯하여/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동요 가사 전문)강소천이 작사하고, 나운영이 작곡한 이 노래는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 영원한 ‘누나’를 만들어주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항거한 청춘의 열사는 그렇
일제강점기 우리 농촌을 지키며 헌신적인 인술을 펼쳐 ‘한국의 슈바이처’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로 불리는 쌍천(雙泉) 이영춘 박사가 재조명되고 있다.문화재청 산하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소장:오춘영)가 일제강점기 경제수탈과 관련된 건축과 인문환경 학술조사에 착수하며 그 첫 번째 대상지역으로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마을을 지정하면서, 이 마을에서 기거하며 주민들을 돌본 이영춘 박사의 자취들도 연구대상에 포함된 것이다.화호마을은 정읍 김제 부안을 잇는 전북의 교통요지로, 때문에 일제강점기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해 대규모 농장을 세우고 막대한
‘오직 신앙과 겨레’ 믿음과 애국 씨앗 뿌리다서천서 ‘국권회복’ 필생의 꿈 기초 놓아 … 전주만세운동에 지대한 영향 미쳐한학에 조예 깊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 목사로서 살아가다가, 시대의 부름 속에 독립운동가로 생을 마친 인물. 경재 김인전의 삶은 그렇게 요약된다.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두 가지 사건에 모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그의 생애가 새삼 부각될 기회를 맞았으나 아쉽게도 큰 주목을 받지 않은 채 해를 넘기고 말았다.비록 조금 늦기는 했지만 크리스천 애국지사로서 김인
서울 연세대 핀슨관 … 신앙 키우던 기숙사로 사용, 윤동주기념관으로 변신송기주 네벌식 타자기 … 언더우드 타자기 개조한 가장 오래된 한글 타자기부산나병원기념비 … 최초 한센인 전문병원 설립 기념, 헌신역사 기억하다2020년 들어서도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의 목록은 계속해서 더욱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다. 특히 근대역사와 한국교회사가 마치 씨줄과 날줄이 만나듯 촘촘히 얽힌 뜻깊은 유산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지정되며 눈길을 끈다.문화재청(청장:정재숙)은 2월 6일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부산나병원’의 설립을 기념하기
역사적 순간마다 신앙양심 중심 지키다일제 압박서 산정현교회 끝까지 수호 … 영적 후손들, 애국신앙 유산 키워가“그대와 걸은 모든 걸음이 내 평생의 걸음이었소. 그대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내겐 소풍 같았소. 그대는 여전히 조선을 구하고 있소? 꼭 그러시오.”(드라마 중에서)긴 칼을 찬 정복 차림의 일본 경찰들은 싸늘한 눈초리로 한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복경찰들까지 수십 명이 현장을 에워싸고 덩달아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65세 고령의 미국인 선교사는 아랑곳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
세상을 보는 바른 눈 가진 인재 양성 진력성경학교 운영 책임 맡아 올바른 시국관과 애국신앙 키워 … 80여 교회 세워 헌신“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으니 여기서 인사합니다. 이번엔, 내가 하는 작별이오. 굿바이(Goodbye) 말고 씨 유(See you), 씨 유라고 합니다.”(드라마 중에서)태극기가 사람들 손에 건네졌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거사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내일이면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그날 전주서문교회의 달성경학교 폐강일 분위기는 여느 때와는 달랐다.달성경학교는 미국남
민족의 희망 앞장 서 일깨운 ‘위대한 스승’최연소 선교사로 한국 찾은 후 만세운동 진실 알려 … ‘더 좋은 교육’ 기회 제공 위해 헌신“화려한 날들만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질 것도 알고, 오래 못 버틸 것도 알지만 우린 싸워야지. 싸워서 알려줘야지. 우리가 여기 있었고, 두려웠으나 끝까지 싸웠다고.”(드라마 중에서)“행진은 질서정연했습니다. 폭력도, 반항도 없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군중을 강제로 해산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단에 오른 스물
조선의 독립의지와 참 모습 세계에 알리다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인 밀사 물밑서 적극 도와 … 외국인 최초 건국훈장 태극장“황제가 미국인 선교사를 은밀히 만날 이유는 단 하나요. 밀서.”(드라마 중에서)“대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일제 관리들은 대 혼돈에 빠졌다. 자신들이 고종의 특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인물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오히려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조선인들이 속속 헤이그에 도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들은 극도로 초조해졌다.호머 베절릴 헐버트 선교사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섬김’에 치열했던 ‘거인’, 모든 것을 다 바쳤다광주지역 소외된 이들의 선생이자 어머니 … 구제 뿐 아니라 ‘존중 받는 인격’의 삶 가르쳐“‘겨우’라는 말은 지워야겠다. 가난한 선교사에게 약은 꽤나 비쌌거든.”(드라마 중에서)“어머니!”광주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울부짖었다. 어린 소녀들, 고아들, 걸인들, 그리고 한센병자들까지. 자신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결국 본인은 영양실조로 숨진 한 백인여성을 위한 눈물이고 통곡이었다. 아련한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쉐핑, 한국 이름은 서서평.소녀들이 기억하는 서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 긍지의 복음 심다첫 근대 중등학교인 계성학교 설립, 애국애족 정신 함양 … 전도재단 세워 후원역할에도 진력“이걸 보고 가는 중이요. 동쪽으로. 해가 뜨는 곳으로. 불꽃 속으로.”(드라마 중에서)서슬 퍼런 헌병대장이 서양인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변명도 공박도 다 소용 없었다. 자신을 선교사이자 학교 교장이라고 밝힌 사내의 요구는 딱 하나, ‘내 학생들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요구가 관철되기 전까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듯 느껴지는 기색이었다.“이들은 조선인이지만 동시에 미국북장
전방위서 한민족 자주독립을 지지하다 “이건 나의 히스토리(History)이자 러브스토리(Love Story)요. 그래서 가는 거요. 당신의 승리를 빌며.”(드라마 중에서)주의 인물(注意人物) 미국선교사.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이름 앞에는 이런 딱지가 붙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죄던 일제가 1909년 11월 통감부 보고서를 통해 요주의 감시대상으로 지목한 미국인에게는 ‘원두우’라는 한국 이름도 있었다. 그는 어쩌다가 당대 권력의 눈에 미운 털이 박힌 것일까.이 보고서가 작성되기 직전인 9월 16일 언더우드는
‘민족정신의 요람’ 근대교육 체계 세우다온갖 반대 맞서 평양 숭실학교 설립 핵심역할 … 네비우스 선교전략, 교육현장에 철저히 구현“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단다. 이 이방의 아이에게 갓 구운 빵과 맑은 물을 허락하시라고. 이 이방의 아이에게 추위를 거두시고 따뜻한 햇살을 허락하시라고.”(드라마 중에서)3·1운동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18년, 평안남도 경무부장은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숭실은 불온사상이 횡일하는 집단이다.’ 그의 표현처럼 일제에게 평양의 숭실학교는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인들이
윌리엄 베어드는 1890년 우편수송선이었던 ‘차이나 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일본을 거쳐 1891년 1월 29일 부산항에 입항하면서 조선(이하 한국)과 낯설지만 감격스러운 만남을 가졌고, 같은 해 9월에 부산에서 사역을 시작했다.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한국에 대한 긍휼로 가득했던 베어드는 선교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목표를 점검을 하면서 크게 두 기둥을 세웠으니, 복음과 교육이었다. 죄악과 무지, 가난과 외침(外侵)에 의한 억압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던 한국 땅, 우리 백성들에게 복음전파와 교육사업은 어쩌면 유일한 희망의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