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신의 요람’ 근대교육 체계 세우다
온갖 반대 맞서 평양 숭실학교 설립 핵심역할 … 네비우스 선교전략, 교육현장에 철저히 구현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단다. 이 이방의 아이에게 갓 구운 빵과 맑은 물을 허락하시라고. 이 이방의 아이에게 추위를 거두시고 따뜻한 햇살을 허락하시라고.”(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3·1운동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18년, 평안남도 경무부장은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숭실은 불온사상이 횡일하는 집단이다.’ 그의 표현처럼 일제에게 평양의 숭실학교는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인들이 일으킨 거의 대부분의 반일운동에는 늘 ‘숭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민회에는 기독교인들, 그것도 숭실의 구성원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민회를 이은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민회 또한 숭실의 재학생들이 주요 멤버들이었다.

①이 땅에 근대학교와 대학의 초석을 놓고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운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②아들 리처드 베어드가 집필한 &lt;윌리엄 베어드 평전&gt; 표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③아내 애니 베어드 선교사가 1908년 우리말로 편찬한 &lt;찬숑가&gt;. ④말을 타고 순회전도를 하는 베어드 선교사의 생전 모습. ⑤숭실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베어드 선교사의 흉상. ⑥양화진외국인묘원의 윌리엄 베어드와 애니 베어드 부부 묘역. ⑦베어드 선교사가 부산에 열었던 한문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사진 맨 뒷줄 왼쪽 끝이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이며, 앞줄 왼쪽 끝이 애니 베어드 선교사.)
①이 땅에 근대학교와 대학의 초석을 놓고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운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②아들 리처드 베어드가 집필한 &lt;윌리엄 베어드 평전&gt; 표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③아내 애니 베어드 선교사가 1908년 우리말로 편찬한 &lt;찬숑가&gt;. ④말을 타고 순회전도를 하는 베어드 선교사의 생전 모습. ⑤숭실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베어드 선교사의 흉상. ⑥양화진외국인묘원의 윌리엄 베어드와 애니 베어드 부부 묘역. ⑦베어드 선교사가 부산에 열었던 한문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사진 맨 뒷줄 왼쪽 끝이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이며, 앞줄 왼쪽 끝이 애니 베어드 선교사.)

조선국민회 결성의 주도자였던 장일환, 서북지역 3·1운동의 분위기를 주도한 선우혁,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한 박희도와 김창준 등 숭실 출신의 활약상은 이루 다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제가 데라우찌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해 소위 ‘105인 사건’을 일으켰을 때도 공격의 타깃으로 삼은 기독인들 중 상당수는 숭실인, 그 중에서도 숭실학교에서 교사 역할을 하고 있던 선교사들이었다. 특히 마펫, 스왈렌, 벡커, 블레어 등 21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핵심인물은 바로 숭실학교 교장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였다.

베어드는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로 아내 애니 로리 베어드(한국명 안애리)와 함께 한국을 찾아왔다. 부산에서 시작해 대구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옮겨 다니며 사역하는 동안, 딸 낸시와 아들 아서 등 어린 두 자녀를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결코 물러섬 없이 이 땅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다.

수많은 사역들 중에서도 베어드의 활약이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바로 교육 분야였다. 부산에서 사역할 당시인 1895년 1월 조선인 아이들을 위한 한문학교(서당)를 연 것을 시작으로,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과 곤당골 교원양성학교 등을 운영하였고, 평양에서는 나중에 숭실학교로 발전하는 사랑방교실의 문을 열었다.

이 땅에 근대교육의 체계가 잡힐 수 있었던 것도, 한국 최초의 근대대학인 숭실대학이 평양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도 베어드의 공헌이다. 그는 모든 수업이 한국어로 이루어지도록 교육의 토착화에 힘썼으며, 학생들 스스로 일하고 벌어서 학교를 다니며 자립심과 자존감을 키울 수 있도록 유도했다. 한마디로 네비우스 선교전략을 교육현장에 철저히 구현한 것이다.

특히 베어드에게 조선인을 위한 학교란 복음 전파의 통로인 동시에, 침략자 일본에게 저항하는 힘을 키우는 민족정신의 요람이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신분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조선의 소년과 소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교육이었던 것이다.

온갖 반대에 맞서 베어드가 숭실대학 개교를 강력히 주창하며 “반기독교적인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선교부가 교육사업의 강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운 데서도 그가 국권을 잃은 조선인의 처지에 얼마나 공감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남편이 이루어낸 하드웨어를 충실한 소프트웨어로 채우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의 작사가로도 잘 알려진 애니 베어드는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교과서들을 제작하는 한편, 찬송가와 각종 문학작품까지 한글로 만들어 교육현장에 보급했다.

1916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숭실 교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베어드는 평양 안팎의 초등학교들을 돌보며 40년 간 한국을 섬겼다. 그는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가 개교하는 것을 지켜본 후, 한 달 만인 11월 28일 장티푸스로 별세해 평양 장산묘지에 묻혔다.

베어드의 사후 숭실대학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맞서다 1938년 3월 4일 자진 폐교하고, 해방과 한국전쟁이 지난 1954년 4월 14일 서울에서 재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122년 역사를 이어왔다.

고인은 떠났어도 그가 한국을 위해 뿌린 씨앗들은 김선두 한경직 명신홍 강신명 방지일 등 목회자, 박형룡 박윤선 김양선 등의 학자, 조만식 등 민족지도자, 안익태 현재명 등의 음악가들 그리고 이들이 온 몸으로 써내려간 민족사와 교회사를 통해 지금도 무수한 열매를 맺고 있다.

베어드 자취를 찾아

서울 상도동의 숭실대학교(서울시 동작구 상도로 369/(02)820-0114) 교정에는 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베어드를 기리는 흉상과 ‘베어드관’이라 명명한 대학본부 건물이 우뚝 서, 고인의 은덕을 기리는 숭실인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캠퍼스 내에 건립된 한국기독교박물관(02-820-0752)에서는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행적과 함께, 아들 리차드 베어드(한국명 안의취)가 집필한 <베어드 평전(William Baird of Korea)> 등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부산 초량교회 역사관(부산시 동구 초량상로 53/(051)465-0533)은 베어드의 첫 선교사역지였던 부산에서의 활약상과 함께, 아내 애니 베어드가 부산에서 어린 딸을 잃고 찬송가 <나는 갈 길 모르니>와 <멀리 멀리 갔더니>를 작시하게 된 가슴 아픈 곡절을 소개한다. 베어드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박건선 박윤선 형제가 설립한 밀양 무지개전원교회(옛 밀양마산교회·경남 밀양시 상남면 외평로 468/(055)353-0046)에는 한국기독교역사사료관이 개설되어, 베어드 이후 경남 선교가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보여준다. 양화진외국인묘원(서울시 마포구 양화진길 46/(02)332-9174)에는 윌리엄 베어드와 애니 베어드 부부의 합장 묘역이 조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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