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희망 앞장 서 일깨운 ‘위대한 스승’
최연소 선교사로 한국 찾은 후 만세운동 진실 알려 … ‘더 좋은 교육’ 기회 제공 위해 헌신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일깨워준 교육자로서, 압제당하는 조선의 대변인으로서 영원히 기억되는 윌리엄 린튼 선교사.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일깨워준 교육자로서, 압제당하는 조선의 대변인으로서 영원히 기억되는 윌리엄 린튼 선교사.

“화려한 날들만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질 것도 알고, 오래 못 버틸 것도 알지만 우린 싸워야지. 싸워서 알려줘야지. 우리가 여기 있었고, 두려웠으나 끝까지 싸웠다고.”(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중에서)

“행진은 질서정연했습니다. 폭력도, 반항도 없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군중을 강제로 해산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단에 오른 스물여덟 살의 선교사는 열띤 어조로 자신이 사역하는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었다. 젊은 선교사의 이름은 윌리엄 알더만 린튼, 한국 이름은 ‘인돈’이었다.

1919년 5월 미국 애틀란타에서는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가 한창이었다. 안식년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린튼은 마침 2년마다 한 차례 열리는 이 대회에 참석해 선교보고를 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상당 부분을 직접 목격한 3·1운동과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린튼 선교사가 기거하던 사택은 현재 인돈학술원으로 사용되며 복음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다. 사진은 인돈학술원 외관과 내부 모습.
린튼 선교사가 기거하던 사택은 현재 인돈학술원으로 사용되며 복음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다. 사진은 인돈학술원 외관과 내부 모습.

“전국 각지로 평화행진이 퍼져나갔습니다. 일본이 항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느새 감옥은 자리가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병대를 보내 사람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습니다. 하지만 행진은 계속 되었습니다. 마침내 일본인들은 평화행진을 하는 수천 명의 조선인들을 총으로 쏘고 검으로 찔렀습니다.”

린튼을 통해 많은 이들이 1919년 3월 1일 조선 땅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됐다. 일본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만세운동의 진상을 세상에 폭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국에 머물던 외국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도 이미 친일 쪽으로 기울었거 나, 개인적인 목적 때문에 굳이 일본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린튼이 첫 교장으로 부임한 군산 영명학교는 올해 옛 건물이 복원되어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린튼이 첫 교장으로 부임한 군산 영명학교는 올해 옛 건물이 복원되어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린튼은 달랐다. 7년 전 최연소 선교사로 한국을 찾아온 그는 주로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을 상대하며, 이들 가슴 속에 담긴 민족적 한과 울분을 이해했다. 특히 그는 당시 군산 영명학교의 교장으로서, 같은 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주도한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의거인 3·5만세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한 인물이었다.

동료 교사 박연세가 학교에서 만세운동 모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갑을 찬 채 끌려가는 것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격분한 학생과 교사들이 군산경찰서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벌인 것도, 잔인한 진압으로 50명 넘는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는 것도, 자식 같고 친구 같은 영명학교 식구들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것도 모두 인돈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린튼이 학생들과 함께 신사참배 강요의 수난을 겪었던 전주 신흥학교.
린튼이 학생들과 함께 신사참배 강요의 수난을 겪었던 전주 신흥학교.

자신이 아끼는 조선인들이 당한 핍박과 설움에 격분한 그는 이후 반일주의 편에 섰다. 군산을 떠나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는 일본이 주도하는 공립학교들을 능가하는 최고 학교를 이루고자 무진 애를 썼고, 학생들 전원이 억지로 일본 신사에 끌려갔다가 통곡만 하고 돌아온 사건에 깊이 마음 아파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온 인돈이 일본의 신사가 있던 바로 그 터에 공중화장실부터 세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남대학교에서는 인돈문화상을 제정해 해마다 선교와 봉사에 앞장선 이들에게 시상하며 설립자 린튼의 정신을 기린다.
한남대학교에서는 인돈문화상을 제정해 해마다 선교와 봉사에 앞장선 이들에게 시상하며 설립자 린튼의 정신을 기린다.

그는 학생들에게 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그들을 위해 더 좋은 학교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기회가 있는 대로 스스로 공부할 기회를 가지며 스승으로서 자질을 갖추고자 노력했다. 또한 시설 확충을 위해 모금에 앞장섰고, 교사들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다그치며 수업에 집중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군산에서나, 전주에서나, 대전에서나 그의 자세는 한결같았다.

그랬기에 학생들 기억 속에 인돈이라는 두 글자는 ‘위대한 스승’과 동의어로 남았다. 린튼은 건강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소임을 다한 후, 1960년 미국으로 떠나며 한국과 마지막 작별을 했다. 2010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린튼에게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린튼의 자취를 찾아

대전 한남대학교(대전시 대덕구 한남로 70/(042)629-7114)는 윌리엄 린튼을 기념하는 공간을 학교 곳곳에 배치하여 설립자의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하는데 힘쓴다. 오정못이라고 불리는 학교 연못 주변을 ‘린튼기념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단장하고, 린튼의 동상을 세워 그가 이 땅에 남긴 업적들을 기린다.

대전 한남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윌리엄 린튼의 동상.
대전 한남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윌리엄 린튼의 동상.

선교사 사택들이 모여있어 오정동선교사촌이라고 불리는 대학 동편에는 린튼의 사택도 남아있다. 인돈학술원(대전 대덕구 한남로 70)이라 명명된 이 공간에서는 기독교세계관에 기반을 둔 학술연구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린튼의 선교 및 봉사정신을 이어받는 기념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건물 주변에서는 린튼의 흉상도 찾을 수 있다.

군산 구암교회(전북 군산시 영명길 22/(063)442-3565)를 방문하면 구암동산이라 불리는 예배당 뒤편 공간에서 옛 영명학교를 복원한 건물을 발견한다. 현재 이 건물은 군산시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되는 중이다. 린튼이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영명학교는 군산 3·5만세운동을 이끄는 주역으로 활약한 바 있다.

전주 신흥중고등학교(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063)232-7070)에는 린튼이 사역하던 시절 건립한 리차드슨관, 스미스관 등 현재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물들이 보존돼있다.

본질 잃지 않은 진정한 교육자 인돈
신사참배 강요에 과감히 폐교

류명렬 목사(대전남부교회)
류명렬 목사(대전남부교회)

1891년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빌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한국명 인돈)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프레스톤(J. F Preston·한국명 변요한)의 강연에 큰 감동을 받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제너럴 일렉트릭스(Genral Electrics) 입사를 포기하고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1912년 당시 21살의 젊은 선교사는 목포항을 통해 첫 선교지인 군산에 도착한다.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고, 1917년에는 교장이 된다. 인돈은 군산지역의 3·1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했으며, 1919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가서는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하여 우리 민족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과 일본의 극악한 만행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22년 인돈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딸인 샤로테(Charlotte Witherspoon Bell·한국명 인사례)와 결혼한 이후 전주로 이동하여 교육선교를 이어간다. 인사례는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인돈 또한 자신의 아들들에게 지게 지는 방법을 가르칠 정도로 부부가 나란히 한국을 사랑했다.

인돈은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자학교의 교장으로 기독교적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 열매도 보았다. 그러나 일제는 선교사들의 학교운영을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특히 신사참배 강요는 1937년 극에 달했다. 인돈의 전기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1937년 9월 6일 오전, 일본 경찰은 신흥·기전학교 학생들을 다가산 일본 신사당으로 끌고 갔고, 항의하는 인돈 교장에게 ‘학생들은 황국식민이다. 어찌 미국인인 당신이 학생들의 황국식민 의무이행을 막을 수 있느냐?’며 항의를 묵살하였는데, 그 상황에서 인돈은 뜨거운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신사에 도착한 학생들은 신사참배에 대한 구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경례를 하지 않았다. 재차 구령이 떨어졌음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퇴장하였다. 기전학교 여학생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려 신사참배는 엉망이 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학생들은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신사참배의 강요 속에, 결국 인돈은 학교를 폐교하기로 결정한다. 폐교를 거세게 반대하는 재학생과 지역주민들의 의사도 있었지만, 인돈은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상황 가운데 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 판단했다. 폐교 이후에는 기독교교육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어느 곳에도 학교 건물을 내어주지 않았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인돈의 결정은 선교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복음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는 중심이 담긴 결정이었다. ‘복음’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선교사역과 운동들 가운데 사실상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선교역사에서 인돈이 남긴 발자취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돈은 학교 폐교와 함께 일제에 의해 추방되고 해방이 된 이후에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도 인돈은 떠나지 않고 한국을 섬긴다. 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인돈은 대전으로 사역지를 옮겨 선교사역을 이어간다. 대전에 기독교 인재양성을 위한 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총장으로 헌신하다가, 1960년 건강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셋째 아들 휴 린튼(Hugh Linton ·한국명 인휴)도 선교사로서 이 땅의 결핵환자들을 위하여 봉사하였고, 인휴의 아들 스티브(Steve Linton·한국명 인세반)와 존(John Linton·한국명 인요한)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세브란스국제진료소장 등으로 대를 이어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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