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목사(광은교회·제105회 총회중독상담대책위원장)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며 신앙생활 장애없도록 돌봅시다

김경수 목사(광은교회·제105회 총회중독상담대책위원장)
김경수 목사(광은교회·제105회 총회중독상담대책위원장)

●시작하는 글

오래전 ‘자살 유가족 돌봄’에 관한 생명사랑목회포럼이 열린 적이 있다. ‘한국교회, 자살 유가족의 상처 어떻게 돌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교회 안에서 생각해야 문제들을 제기하는 포럼이었다. 당시 강사와 패널들은 자살을 경험한 가족의 사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면서, 이들에게 어떤 돌봄이 필요한가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발표했다.

2019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자살사망자 수는 총 1만3799명으로 전년 대비 129명(0.9%) 증가하였고, 1일 평균 자살사망자 수는 37.8명으로 나타났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6.9명으로 전년 대비 0.2명 증가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10~20대, 60대의 경우 전년도보다 자살률이 증가하였으며, 30~50대, 70대 이상은 전년도보다 감소하였다. 성별 자살률을 보면 남자는 38.0명(-1.4%)으로 전년보다 감소하였고, 여자는 15.8명(6.7%)으로 전년에 비해 증가하였다.

이렇게 급증하는 자살로 인해 유가족들의 숫자도 늘고 있다. 자살한 사람이 떠난 후에도, 남은 가족들은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야 한다. 자살은 당사자 개인에게도 비극이지만, 고통의 몫은 남은 자들이 짊어진다. 상실감 때문에 울고, 사회적 시선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심한 자책과 죄의식으로 고통을 겪는 게 유가족들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목회자들은 자살한 유가족들의 상처를 돌보고 위로하는 사역에 나서는 게 맞다. 그런데 현실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자살한 가족들을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지인들마저 유가족들을 회피하고 민감하게 반응함으로 결국 유가족들이 교회를 떠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살 유가족들이 받는 고통들

한 개인을 자살로 이끈 상황이 어떤 것이든, 그 사람이 내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으리라는 짐작을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깊은 고통은 자살 자체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슬픔과 상처로 남는다. 특히 자살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을 때 유가족들은 더욱 고통스럽다.

대개의 경우 유가족들은 자살한 사람과 작별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서로 생을 달리하고 말기 때문에 스스로를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무능한 존재로 느끼는 자책과 죄의식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 유가족들이 느끼는 대표적인 고통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죄책감

자살 유가족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치욕감’과 비슷하다. 유가족들은 스스로 죽은 가족의 자살을 예견하고 방지할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했었다고 생각하면서, 죽음을 자신이 사적으로 유발시켰다고 느끼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때문에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유가족들의 죄책감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으로 이어지며, 긴 시간 동안 유가족들을 괴롭힌다. 비록 죄책감이 모든 죽음과 관련된 슬픔의 단계들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지라도 특히 자살 유가족들이 느끼는 죄책감의 경험은 훨씬 더 빈번하고, 훨씬 더 강력하며, 훨씬 더 지속적이다.

소외감

자살 유가족들은 쉽게 상처를 받는다. 가족의 상실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이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많다. 하지만 실제 자살 유가족들에 대해 충분한 위로를 주지 못하는 모습들을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목회적 돌봄,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것이다. 목회적(사회적) 위로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에서 사별의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관찰된다. 잘못하면 가족들이 느끼고 있는 아픔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배신감

유가족들은 자살한 가족에 의해서 자신들이 거부되었다(혹은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은 유가족들에게 피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을 일으킨다.

혼란에 빠진 유가족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다 무의식적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가족 중 누군가에게 모든 탓을 돌리거나 책망하는 일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유가족들 사이 심각한 불화로 이어져, 각자의 내적·외적 관계들을 어렵게 만든다.

더 나아가 유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더욱 복잡해지고, 서로를 오해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면 자살한 인물에 대한 분노가 깊어지고, ‘어떻게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라는 일종의 배신감을 심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살 유가족들의 돌봄

자살 유가족이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누군가를 슬퍼하는 가족, 더욱 확장시키면 친구들까지 의미한다. 이 유가족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슬픔이라는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슬픔에 빠진 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목회자에게는 심리상담적 식견과 동시에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실 자살 유가족을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살한 사람을 나약하다고 비판하고, 또 누군가는 자살행위에 대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단정한다. 만약 그들이 좀 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은 당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었을지 이해하지 못한 채 쉽게 나온 생각들이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자살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유가족들은 때로 위로의 전화마저도 꺼리게 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비극적 상황을 반복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떠나버리면 가족들은 그 상황을 설명하면서, 또 다른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아픔도 겪는다. 유가족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가족들은 자살한 사람으로 인하여 분노의 감정을 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들이 자살한 사람을 더 잘 돌보고 도왔더라면 비극적인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다. 타인들의 왜곡된 시선은 거기에다 수치심과 상처를 유가족들에게 더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라면 목회자는 자살 유가족들을 위로해주는 한편으로, 자살한 본인이나 그 가족들에 대해 함부로 비판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간주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들의 현실을 이해해주어야 한다. 

만약 자살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죄 용서와 구원의 유효성이 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다음으로 자살 유가족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그 실제적인 내용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죄책감의 돌봄

자살한 가족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은 이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고인에게 그동안 잘해주지 못했던 것, 서운하게 한 것, 마음 아프게 한 점 등등이 생각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등 여러 문제들이 유가족들에게 내재된다. 목회자는 행여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의 감정을 돌보아주어야 한다.

둘째, 사회적 냉대의 돌봄

잘못된 윤리 개념으로 인하여 유가족들이 주변을 의식하며 자살을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이 사회적인 냉대와 수모를 이길 수 있도록 돕고, 자신 있게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용기를 주어야 한다.

셋째, 신앙적인 돌봄

교회생활 속에서도 유가족들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위축되기 쉽다. 목회자들은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 못지않게, 그들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오지 않도록 돌보는 일에 신경을 써야한다. 특히 ‘자살하면 곧 지옥으로 간다’는 식의 편견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천국에 가고, 자살로 죽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교회 안팎에 퍼져있었다. 그릇된 상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천국에 갈 수가 있다.

비록 급박한 스트레스, 경제적 부담, 쫓기는 심리적 갈등 때문에 돌파구를 찾다가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면 자살로 인해 구원 받지 못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유가족들을 돌봄에 있어서는 자살한 가족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의 자녀였고, 온전한 신앙고백을 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위로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나가는 말

자살 문제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예화가 하나 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인 존 뉴튼(John Milton)은 사람이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세 가지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자신이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천국에 꼭 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안 왔을 경우이고, 셋째는 ‘저 사람은 못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천국에 왔을 때라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여기에 인간의 잣대는 개입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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