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원 지역 최초의 교회였던 철원제일교회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유명했다. 그 아름다웠던 예배당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이제 벽체와 기둥 일부만 남아 있다. 예배당 유적지 옆으로 지난 2013년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세운 ‘철원제일교회 복원기념예배당’이 보인다.

복음으로 끝내 지킨 아픔의 역사 증언
일제의 핍박과 한국전쟁 상처 선명하게 남아 …
민족 품은 흔적서 신앙 결기 다듬다

길을 뻗어 있지만 노동당사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남북분단을 상징하는 ‘분계선접경지역’ 표지판과 검문소는 저 너머 땅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총탄과 포탄 자국이 선명한 노동당사는 “아직 6.25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 했다.

철원 노동당사에서 남쪽으로 500미터에 철원제일교회가 있다. 세월의 거뭇한 흔적으로 얼룩진 철원제일교회 기둥과 벽만 남기고 무너져 유적지 바로 옆에 ‘철원제일교회 복원기념예배당’이 있었다. 오랫동안 철원제일교회 복원에 애쓰던 기독교대한감리회는 복원건축위원회와 동부연회, 월하교회 등의 협력을 받아 2013년 10월 29일 예배당을 완공했다.

민족의 아픔 속에서 태어나다

▲ 철원제일교회 예배당 옆에 건축한 복원기념예배당

철원제일교회는 1905년 웰번 선교사가 설립했다. 철원 최초의 교회였다. 현재 유적지에 남아 있는 예배당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건축가 윌리엄 보리스가 설계해 1936년 건축한 것이다. 당시 철원읍교회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이름을 날렸고, 무너져 흔적만 남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철원제일교회는 교회설립 이후부터 배영학교 정의학교 영동야간학교 등을 운영하며 교육사역으로 민족을 일깨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철원읍 주민들은 인근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동한 이들은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와 청년 성도들이었다.

철원제일교회 성도들은 철원읍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후 아예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 들었다. 철원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보면, 일제가 1920~30년대 정치범을 재판한 기록이 남아있다. 일제는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애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상해임시정부와 호응하여 조선독립운동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 자들”이라며, 박연서 목사와 강대려 김완호 김철회 신순풍 엄성훈 엄주표 이봉하 이연수 이용 등을 투옥시켰다. 이들이 모두 철원제일교회 성도들이다.

예배당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

일제의 압박과 핍박 속에서도 철원제일교회는 교육사역과 항일운동으로 민족을 일깨우며 부흥했다. 1936년에 ‘한강 이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철원제일교회는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1930년대부터 많은 지식인과 목회자들이 일제에 동조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철월제일교회가 소속된 감리교단도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그러나 철원제일교회에 1939년 부임한 강종근 목사는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을 거부했다. 강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설교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940년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결국 강종근 목사는 고문과 수감생활로 1942년 순교하고 말았다. 신사참배 거부로 소천한 첫 순교자였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순교자를 낳은 철원제일교회는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북한 인민군이 예배당을 병영으로 사용하면서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그 아름다웠던 예배당은 그렇게 무너졌다.

이념을 넘어 사랑을 외치다

▲ 철원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장흥교회 예배당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
장흥교회 돌벽돌 예배당 옆에 기념비가 서있다. ‘고서기훈목사순교기념비’에 새겨진 이 문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다운 죽음이 아니고,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

철원제일교회에서 남쪽으로 8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동송읍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장흥교회와 만날 수 있다. 장흥교회는 모교회인 철원제일교회에 이어 1920년 철원 지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됐다. 철원제일교회의 신앙정신을 이어받아 장흥교회도 복음전파와 민족사랑이 투철했다. 특히 장흥교회도 순교자를 낳은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자 철원 지역은 공산주의 세력 아래 놓였다. 이때 장흥교회 청년 성도들을 중심으로 김일성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신한애국청년회가 조직됐다. 그러나 신한애국청년회는 곧 발각이 됐고, 담임 박경룡 목사가 교회를 떠나고 서기훈 목사가 부임했다.

6.25한국전쟁과 1.4후퇴 당시 철원은 치열한 전쟁의 한 복판에 있었다. 국군과 북한군 모두에게 점령당했고, 서로를 죽였다. 이런 동족살육의 비극을 막아선 인물이 서기훈 목사였다. 서 목사는 공산주의자를 처형하려는 교회 청년과 주민들에게 원수도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을 외치며, 체포한 공산주의자들을 풀어주도록 했다. 그러나 1950년 다시 철원을 점령한 북한군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장흥교회를 주목했고, 결국 서기훈 목사는 그해 12월 31일 끌려가서 1951년 1월 8일 순교했다.

70년 전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누구보다 심하게 겪은 철원. 지금도 분단의 상처가 남아 있는 그 곳에서, 철원제일교회와 장흥교회는 복음과 민족과 국가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서기훈목사순교기념비 옆면에 새겨진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 비문

강원도 철원 지방에서 목회하던 감리교회 목회자 중에 해방 이전 신사참배 반대 및 민족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철원경찰서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교하신 분은 강종근목사이다. 또한 서기훈 목사는 6.25전쟁 중 공산당에서 잡혀가서 순교 당한 분이다.

강종근 목사는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죄목으로 일제에 의해 철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중 1942년 6월3일 순교하셨다.

강종근 목사는 1904년 평남 강서군에서 강영동과 박형옥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대에 일제의 득세에 울분하며 만주 길림성 철령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초등학교 시절 철령이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최학기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으며 최 목사로부터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 3.1운동이후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제15회로 졸업하였다.

강종근 목사는 배재학당시절부터 하디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며 졸업 후에는 고향인 만주 철령 지방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1936년 경기도 연천감리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였다. 이때부터 강종근 목사는 애국적 설교를 많이 하여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1939년에 강원도 철원감리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이때 이미 감리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여 본격적으로 시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강 목사는 교회에서 학생들과 교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다가 1941년 경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철원경찰서에서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41년 10월 9일에 징역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복역 중 병을 얻어 1942년 6월 3일 38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다.

철원 지방의 또 한 명의 순교자인 서기훈 목사는 1882년 12월 19일 충남 논산군 가야곡면 육곡에서 서영구의 독자로 태어났다.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시기에 먼저 믿음을 가졌으며 고향인 육곡에 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16년 제6회(동기:정춘수 김인명 오화영)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주로 강원도 원산과 철원에서 사역하였다. 처음에는 강원도 통천과 간성에서 사역을 하였으며 후에 원산 구세병원 원목으로 사역했고 광명 보통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1년 철원의 김화읍교회를 담임하면서 철원지방 감리사로 4년동안 사역하면서 지역 교회들을 돌아봤고 장흥리교회도 동사목사로 시무했다. 특히 1941년 원산지방 사경회를 인도하고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10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서기훈 목사는 해방 후 원산지방 신고산교회를 시무하였으며 이후 철원 장흥교회에 파송되어 사역하는 중 6.25 전쟁을 맞았다. 그런데 9.28 서울 수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 중 퇴각하는 공산군들이 그해 12월 31일 장흥리에서 서기훈 목사를 연행하여 정치보위부로 끌고 가 고통을 주다가 1951년 1월 8일 퇴각하면서 총살 시켰다. 이때가 서 목사는 고희를 맞은 노인이었다. 이처럼 서기훈 목사는 목회자의 길을 가다가 전쟁 중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총살에 순교의 길을 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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