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고향 진해 웅천에 세워진 기념관 전경.

진실한 신앙과 애국의 길을 다시 묻다
‘일사각오’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항일독립운동 생애 복원, 민족사적 감동 이끌어

지난해 성탄특집 TV 다큐멘터리로 그 생애와 신앙이 소개되고, 연이어 극장 영화포스터에 그의 얼굴이 등장하며, 관련 도서들까지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주기철’이라는 세 글자는 세상사람 모두가 아는 이름이 됐다.

그런데 정작 그의 뒤를 따른다고 자부하는 믿음의 후예들인 우리는 그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의 명예회복이 완결되지 못했다는 사실마저 인지하지 못했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우리가 과연 그를 면직했는지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이다. 남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음 깊이 반성하라는 자책에 짓눌려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 전시실에 설치된 주기철 목사의 흉상.

해마다 봄이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피는 벚꽃이 수많은 관광객들을 모으는 아름다운 동네 진해, 바로 거기가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었다. 해양공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세워진 길목, 옛 웅천읍성의 고풍스런 자태가 건재한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던 중에 드디어 ‘주기철목사기념관’을 마주칠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개관한 기념관 간판 앞에는 ‘항일독립운동가’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익숙한 수식어가 아니다. 언제고 주기철이라는 이름 앞에 ‘순교자’나 ‘일사각오’라는 연결단어가 자연스레 입에 오르내리던 우리에게는 조금 당황스럽다. 하지만 진실하게 예수 믿는 일이 나라 사랑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그의 시대, 그의 삶을 생각하면 사실 그리 어색할 일도 아니다.

신사참배, 식민치하를 살아가던 이들에게 특히나 예수 믿는 이들에게 그것은 치욕의 굴레였다.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는 신앙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현세의 안위가 더 소중했던 사람들은 기어코 핑계거리를 찾았다.

온 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가 일제에서 자행한 4차례의 검속과 고문 그리고 투옥에 시달리며 생명이 타들어가는 동안, 그들은 타협하고 강변하며 변절한 종교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의 역사에서도, 하나님나라에서도 끝내 부끄러운 존재로 남고 말았다.

대신 주기철 목사처럼 목숨 걸고 꼿꼿이 옳은 길을 걸어간 이들은 영원히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다시 살아난 조국도 그 이름을 기억한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고, 2007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했다. 주기철 목사의 생애는 한국교회만의 자산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자산이 된 것이다.

‘면류관’이라 명명한 기념관의 제1전시실에서 이처럼 주기철 목사의 영웅적인 풍모를 느낄 수 있다면, 계단을 올라가 만나는 ‘나라사랑’이라는 이름의 제2전시실에서는 평범한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때로 충직한 시골교회 집사, 혹은 다정한 남편과 아버지로 나타나는 면면에서 순교자의 삶이 어떤 비범한 이들에게만 허용된 게 아님을 확인한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가족들의 따뜻한 위로와 보살핌을 갈망했던 흔적을 짚어보면 그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존재였음을 짐작한다.
주기철 목사가 기도처로 즐겨 찾았다는 마산 무학산의 십자바위는 구국기도실로 꾸며놓았고, 청빈했던 그의 일상은 소양홀이라 이름 붙인 작은 공간에 재현되어있다. 순교자의 삶을 십자가 이미지와 연결시켜 꾸며놓은 특별전시실도 특별한 감흥을 일으킨다.

오늘 여행의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 김정훈 목사의 발길이 전시실 한 곳에서 오래 멈춘다.

특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을 재현한 코너였다. 한동안 뚫어져라 그 광경을 응시하던 김정훈 목사가 자신과 주 목사 사이에 얽힌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이야기한다.

▲ 마산동부교회 신명곤 장로가 기념관에 기증한 십자가 작품들.

“주기철 목사님의 첫 담임목회지였던 부산 초량교회에서 남전도회의 헌신으로 반송제일교회를 개척한 일이 있어요. 바로 지금 제가 담임하는 새누리교회의 전신이지요. 마침 여기 재현된 강대상도 초량교회에서 사용하던 것이라는 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저 또한 주 목사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 이렇게 마주서니 그 감회가 새롭네요.”

관람을 마치고 전시관을 빠져나오는 중에 주 목사의 유언과도 같은 글귀가 다시 떠올랐다.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단어를 후세 대대로 마음판에 새기도록 만든,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설교문이자 기도문이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거늘 어찌 내가 이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내가 백 년 천 년을 산들 그것이 무슨 삶이리요?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양 주기철 목사의 생애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전국 지자체별로 기독교문화유산을 발굴하고 관광자원화하는 작업이 활기를 띄면서 주 목사의 고향인 경남 창원시(시장:안상수)에서도 지난달 ‘주기철 목사 성지순례길 탐방코스’ 개발을 발표했다.

62.5km에 달하는 탐방코스에는 주기철목사기념관을 시작으로 웅천교회와 웅천초등학교,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마산 문창교회, 그리고 함안의 손양원목사기념관 및 생가가 포함된다. 코스 순례에 걸리는 시간은 도보와 차량 이동시간을 합쳐 약 1시간 40분에 이른다.

지난해 3월 주 목사가 나고 자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에 세워진 주기철목사기념관은 고인의 생애와 신앙에 관한 기록과 각종 자료들을 두 개의 전시실과 영상실을 통해 소개한다. 또한 구국기도실, 소양홀 등에서도 순전한 믿음으로 살았던 그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주 목사의 신앙요람이 되어주었던 웅천교회와 웅천초등학교는 기념관 지척에 있다. 특히 웅천교회는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비와 자체 순교기념관 등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일가에 관련된 각종 원본기록들과 관련 도서 등의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주 목사의 집안 어른인 주기효가 1906년에 세운 웅천초등학교(구 개통학교)는 주기철 목사의 모교이기도 하다.

장소를 마산으로 옮기면 마산공원묘원 내에 설치된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과 호주선교사 묘역, 마산 최초의 교회이자 고인의 두 번째 목회지였던 문창교회 사료실 등에서 주기철 목사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무학산 학봉 능선을 타고 가다보면 주 목사의 기도처였던 십자바위에 다다르게 된다.

손양원 목사는 주 목사와 성경학교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 믿음의 동역자이자, 훗날 순교의 길까지 함께 걸어갔던 각별한 사이이다. 마산에 이웃한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는 지난해 10월 손양원 목사 기념관 건립과 생가 복원이 이루어져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창원시는 순례코스와 주변 관광지를 한데 묶어 1박 2일의 체류형 관광코스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순교신앙으로 다시 날아올라야”

하나님의 은혜로 고 주기철 목사님 발자취를 돌아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은혜와 눈물, 감동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 목사님은 피 흘리고 생명을 바쳐가며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순결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지켰으나, 이후 한국교회는 그의 신앙을 계승하지 못했던 아픈 역사를 바라봅니다.

순교자들이 생명 바쳐 지킨 신앙의 그루터기 위에서 부흥한 우리 한국교회에 오늘날 십자가 고난의 영성이 무디어지고, 복음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안티기독교가 기승을 부리고, 이단과 건전하지 못한 단체들이 전도와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물결은 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까지도 덮쳐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신앙을 계승하고 후대에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앙,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신앙, 순수한 십자가복음 신앙, 철저한 기도의 신앙, 주일학교 교육을 중시한 신앙, 하나님께 드리고 순종하는 신앙, 가르친 대로 살며 본이 되는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보, 따뜻한 숭늉 한사발이 먹고 싶소.” 주기철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사모님께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가슴을 찌릅니다. 긴 수감생활과 잔혹한 고문 때문에 무너질 대로 무너진 앙상한 육신은 목을 축이고 속을 덥혀줄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순교로 승리하신 주 목사님을 본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다시 비상하기를 기도합니다.
김정훈 목사(총회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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