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일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으로서 국가사적지 제299호로 지정된 제암교회와 순국기념관.

‘순교’와 ‘순국’은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조국을 사랑한 신념을 온 몸으로 표현했던 희생, 새로운 각성의 계기 제공해

 

4월 15일 이른 오후, 군인들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29명이 모이자, 교회를 포위하고 창문으로 사격을 가해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자 교회에 불을 질렀다. 몇 명이 탈출했으나 도중에 사살되었고, 예배당 밖에서 도망치다 사살된 시체 6구도 발견되었다. 남편 생사를 알려고 달려온 마흔 넘은 여인은 사살되고, 19세 여인은 칼에 찔려 죽었다.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스코필드 선교사의 제암리 학살 사건보고 중)

교회당은 마을의 중심지였고, 회합의 장소였고, 결국엔 공동의 묘지가 되었다. 기독교인 타종교인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나라를 위해서 한마음이 되었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했다.

▲ 희생자 묘역 주변을 장식한 태극기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째, 화성지역은 유난히 국난극복의 의지가 강했던 지역이었다. 일제가 화성 일대의 갯벌을 논과 염전으로 간척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탈이 자행됐고, 이에 따라 국권에 이어 재산까지 빼앗긴 화성의 주민들에게는 반일감정이 드높았다.

여기에다 이 일대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함께 유입된 기독교 자유사상은 성도들은 물론 주민들에게까지 자주독립의 열망을 더욱 크게 불러일으켰다. 전국적 만세운동이 발발하자 화성 일대에서도 들불처럼 봉기가 번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봉기는 유난히 거세고 위력적이었다.
그러던 중 총칼로 만세시위를 진압하려던 일본경찰들이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자 화성 일대는 일제에게 집중적인 토벌지역으로 지목된다. 특히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앞장섰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공격의 표적이 됐다.

▲ 불타버린 제암교회 예배당을 재현한 미니어처.

4월 5일부터 1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펼쳐진 복수극을 제암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제암리는 가장 혹독하고 잔인했던 마지막 날의 희생양이었다. 마을 남자들을 교회당으로 모은 일본 경찰은 ‘기독교의 교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 교인이 “성서는 이웃간 친밀하게 지낼 것과, 신을 경건하게 섬겨 받드는 것과, 최후의 심판을 가르친다”고 대답한 직후 학살이 자행됐다.

순흥 안씨 일가인 안봉순 안종후 안진순 등과 김덕용 김정헌 홍원식 강태성 조경칠 등 제암교회 남자성도들은 불타는 예배당 안에 갇혀 이웃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남편을 찾으러 교회당으로 달려온 홍원식 강태식의 아내들도 일본군의 총칼 앞에 무참히 희생됐다.

하지만 일제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죽음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사건 직후 화성지역에는 구국민단이 결성되고, 신간회 지회가 결성되는 등 독립운동 세력의 강력한 규합이 이루어졌다. 제암교회는 석 달 후 자리를 옮겨 재건되었고, 오늘에까지 역사를 이어간다.

1959년 4월 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1970년 8월 선조들의 만행을 회개하는 일본 기독교인들과 사회단체가 속죄의 뜻을 담아 새 교회당과 유족회관을 건축하는 등 제암교회 주변에는 사건 후 거의 100년에 걸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82년 대대적 발굴 작업으로 수습된 시신들을 합장한 23인 순국 합동묘지와, 당시의 유물 및 생존자 증언 등을 모아 2001년 개관한 기념관 그리고 일대에 조성한 기념공원도 매일 같이 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객들을 맞고 있다.

▲ 제암리삼일운동순국기념관 전시실에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조형물 <살육의 자리>.

특히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밝힌 제암교회 전동례 권사(안진순의 아내)의 증언, 제암리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린 선교사들의 보고, 초가집 사랑채였던 옛 제암교회당의 재현 모형 등이 눈에 띄는 전시물들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과 제암교회(최용 목사)를 찾아온다는 함성익 목사(창성교회)는 이곳에서 신앙과 애국, 순교와 순국의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특히 올 회기 총회 순교자기념사업부 회계와 역사위원회 서기로 봉직 중인 그에게 제암리 방문은 신앙이 갈수록 개인주의화하는 세태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각성을 일으킨 듯 했다.

“위태로운 조국 앞에서 모두가 한마음이었군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신념을 온 몸으로 표현했던 그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교회당과 전시실을 찬찬히 둘러보고, 이어 만세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묘역으로 오르는 길목. 곳곳마다 태극기와 무궁화가 수놓은 듯 펼쳐져있다. 그리고 위편 하늘 위로 불쑥 솟아오른 예배당 십자가가 눈에 띈다. 그랬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순교’와 ‘순국’이 다른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 제암리 순국유적지에 건립된 스코필드 선교사의 동상.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한 몸으로 자전거를 끌고 와 제암리교회 학살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모습을 재현했다.

제암리교회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명을 가진 그 주인공은 벽안의 외국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이다. 캐나다 국적의 선교사이자 수의학자였던 그는 삼일운동 당시 벌어진 일제의 포악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제암리 삼일운동 순국유적지를 방문하면 자전거를 한 쪽에 세워놓고 카메라를 든 채 분노에 찬 시선으로 살육의 현장을 응시하는 스코필드의 동상과, 그가 이 땅을 위해 헌신한 업적들을 소개하는 비문을 만날 수 있다.

1916년 내한한 스코필드 선교사는 세브란스의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지도자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기미년 당시 학살 소식을 전해 듣자 4월 18일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를 찾아와 직접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하며 진상을 조사했고, 같은 날 또 다른 학살현장인 수촌리로 이동해 부상자들을 돌보며 일본의 잔악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써 세상에 전했다.

스코필드처럼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에 분노하고, 이를 사진이나 기록으로 남겨 자칫 일제에 의해 은폐될 뻔 했던 진실을 폭로하고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일에 앞장선 외국인들 중에는 특히 선교사들이 많았다.

제암리 사건이 벌어진 후 가장 먼저 현장을 방문하여 외부세계에 처음으로 참혹한 학살의 증거들을 알린 장로교선교부의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제암리교회가 소속된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로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미국영사관에 일본의 만행을 조사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노블(한국명 노보을) 등이 대표적이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본의 야만적인 압제 행위를 비판하는 글들을 언론에 기고하고, 하세가와 총독이나 야마가타 정무총감 같은 책임자들을 직접 찾아가 항의하는 등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의기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투옥된 인사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등의 행동으로 일본에게는 ‘가장 과격한 선동가’로, 우리 동포들에게는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려졌다. 일제의 추방으로 1920년 강제 출국했던 그는 해방 후인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육영사업과 언론활동 등에 힘쓰다 1970년 이 땅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정부는 그에게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1960년)과 건국공로훈장(1968년)을 수여했고, 그의 시신은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지난 3월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됐다.

화성시기독교총연합회(회장:박만규 목사)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회장:정운찬) 한국고등신학연구원(원장:김재현 목사) 등은 올해 삼일절 기념예배와 스코필드 제암리 답사 재현행사, 스코필드 전기 독후감 공모전 등으로 고인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는 중이다.

 

진정한 순교의 의미를 되물어보다

▲ 제암교회당을 방문해 순교자들을 추모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함성익 목사.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에 천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 가운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이 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교회에서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신자들을 모이게 하였고, 문을 폐쇄한 후에 교회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 당시 23명이 목숨을 잃고, 교회 마당에서는 6명이나 되는 인명이 살상되고, 30여 호의 마을까지 불타버리는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 이것이 제암리교회의 과거 역사이며, 희생이다.

과거 한국교회에는 헌신과 희생의 순교자가 많았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뭇 성도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은 주기철, 손양원, 김익두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다. 당시 20만 명도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은 나라와 민족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그러한 헌신과 희생이 한국교회를 부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진정한 순교는 무엇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은혜가 한국교회에 부어졌지만 지금이야말로 순교의 마음과 정신을 회복할 때이다.

첫째는, 부활의 확실한 소망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정한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며, 분명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다. 둘째는, 사명 감당하는 것이다. 사명은 가정과 사회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교회의 영적인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힘을 내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믿음으로 달려가자.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용기와 담대함을 증명했던 믿음의 선열들을 기억하자. 이제는 우리가 믿음의 선열들이 보여주신 순교의 정신을 되찾아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믿음의 세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함성익 목사(창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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