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길서 복음 지킨 이기풍을 만나다
신사참배 마지막 싸움 피하지 않던 신앙의 기개, 순교기념관 통해 또렷하게 전해
여수 금오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 유명한 비렁길을 찾아온다. ‘비렁’이란 ‘벼랑’을 이곳 토박이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해안선을 타고 위태롭게 이어지는 절벽의 풍경을 둘러보며 오르내리는 비렁길 답사는 관광객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렁길이 평생 이어진다면 어떠할 것인가. 과연 그리된다 해도 마냥 가슴 뛰게 즐거울 수만 있을까. 그런 삶이 안락한 일상과 소중한 재산과 가족마저 내려놓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여기 금오도에서, 마치 비렁길의 자태처럼 살다 간 사람이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여수 신기항에서 배를 타고 우학리교회(봉세환 목사)로 향한다.
이기풍 목사가 금오도 우학리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은 1934년의 일이다.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노구를 이끌고 전라도 남쪽 끝 섬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많은 면에서 ‘최초’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다녔던 인물이다. 평양신학교 최연소 입학자이자, 제1회 졸업생이었으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동시에 최초의 외지선교사였다. 전라도 광주의 모교회인 광주북문안교회의 초대목사를 지냈으며, 제주 일대에 수많은 교회들을 세워 제주노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하며 전진하는 삶이란 절벽을 타고 넘는 일처럼 고단한 것이었을 터이다. 더욱이 1921년에 대한예수교장로교 제10회 총회장을 지낸 이후에도 편안하고 대접받는 길로 옮겨가지 않고, 낙도오지를 돌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동시에 그는 결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고향인 평양에서 한학을 연구하며 살던 시절 낯선 이방인 선교사(마포삼열)에게 돌을 던져 부상을 입힐 수 있었던 것도, 회심한 후에는 매서인 혹은 조사의 신분으로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도 신념이 남김없이 삶으로 드러나는 그의 순전한 처세방식 때문이었다.
이 결기는 결국 그의 마지막 사역지가 된 우학리교회에서 절정에 이른다. 신사참배가 조국 교회를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위세 등등했던 시대, 함께 복음의 전선을 지켰던 동역자들의 배신과 변절까지 속출하던 무렵에 이기풍 목사의 벼랑 끝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 목사가 소속되어있던 순천노회는 신사참배에 대해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누구보다 앞장서 전개하던 중이었고, 더구나 담임하던 우학리교회 뒷산에 바로 일본 신사가 세워지는 바람에 한국교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주목과 신망을 받아온 그에는 이 싸움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일본 순사가 지켜보고 있어도 아랑곳 않고 설교를 통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일본을 비난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는 신사가 세워진 교회 뒷산에서 놀지도 말라고 가르칠 정도로 이기풍 목사는 당당히 곧은길을 갔다.
외딴 섬 교회를 담임하는 초라한 자리에 있었어도 그는 민족과 교회의 대적들에게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음이 확실하다. 스파이 누명을 씌우고 투옥한 것으로도 모자라 머잖아 여든을 바라볼 나이에 접어든 목사에게 혹독한 고문까지 가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 권사는 일본 경찰 앞에서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강직한 성격 탓에 나중에는 취조하는 사람인지, 취조를 당하는 사람인지 분간을 못하리만치 상대방이 말이 끝이 나면 책상을 치며 대들었으니 남들이 당한 이상의 고초를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저서 <이기풍>(기독교문사, 2008년)에서 증언한 바 있다.
옥중순교를 각오한 그를 일제는 억지로 집에 돌려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42년 6월 21일 주일 아침에 숨을 거두고 만다. 소천하기 전 아내 윤함애 사모와 김문옥 장로의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집례한 성찬식에서도 이 목사는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간곡한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행적을 기억하는 이들의 정성이 모아져 제주도에 이어 우학리교회에도 2009년 11월 28일 이기풍목사순교기념관이 세워졌다. 이기풍 목사 재직 당시의 예배당을 그대로 재현해 건립한 기념관은 이기풍 목사의 생애를 입체화로 소개한 전시물들과 유족들이 기증한 고인의 유물, 이 목사의 친필이 기록된 우학리교회 당회록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우학리교회는 제16대 담임목사였던 조강석 목사 재직 당시 5년여의 공사 끝에 이 전시관을 개관했다.
교회당 옆 마을묘지에 안장되었던 이 목사의 시신은 오래전 화순의 가족묘지로 이장했지만, 아직도 그의 자취를 느끼고 본받고자 금오도를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연중 이어지고 있다. 교회당 앞의 장미정원은 한 겨울에도 꽃봉오리를 활짝 피우며 역경의 세월 속에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았던 이기풍 목사의 아름다운 신앙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비렁길 신앙. 이기풍 목사의 생애를 그렇게 불러도 될까. 고단하고 외로웠어도, 두고두고 푸르며 꼿꼿했던 그 험로를 나란히 걸어보자고 비렁길은 오늘 우리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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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신앙 계승이 더 중요한 과제”
우학리교회 이기풍목사순교기념관을 관람하다보면 색다른 전시물 하나가 눈에 띈다. 오동나무로 짠 목관이다. 3년 전 우학리교회 107주년 기념예배 당시 제작해 전시관 안에 설치해 둔 것이다.
관람객들이 뚜껑을 열어보면 관 속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죽음 앞에 직면한,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려보라는 의미를 이 작은 목관에 담아두었다고 봉세환 목사는 설명한다.
“이기풍 목사님이 단순히 우학리교회의 자랑이나 관광 상품에 그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이어가는 교회’가 우리의 슬로건인데, 그 순교신앙을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삼는것이 더 중요한 과제임을 확신하며 성도들과 탐방객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즉 순교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는 우학리교회를 앞서 담임한 이기풍 목사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났다. 후손인 이준호 목사(광주 풍성한교회)로부터는 고인이 자신을 기리고자 하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했다는 유언을 전해 들었으며, 안기창 장로(우학리교회 제2대 장로)에게서는 노령에도 복음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혔던 고인에 대한 회고를 청취했다.
그래서 봉세환 목사와 교우들은 이기풍 목사가 보여준 신앙의 모범을 고스란히 이어받고자 애쓰고 있다.
열심히 전도하고, 이웃들을 겸손히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며, 섬 안에서 유일하게 주일학교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믿음의 후손으로 키우는데도 열심을 내고 있다. 봉세환 목사의 꿈은 이것이다.
“이기풍 목사님 외에도 6·25 당시에 황도백 곽은진 백인수 안경수 등 4명의 순교자들이 저희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비록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길은 걷지 못하더라도, 순교적인 신앙과 삶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70세의 고령으로 우학리교회 제6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기풍목사는 1868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 믿고 조사가 되었으며,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 1907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이때 7인의 목사가 함께 장립을 받았는데,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독노회는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하여 파송했다.
이 목사는 제주도에 1908년 초에 도착하여 성내교회를 비롯한 15개 교회를 세우며 전도와 교회개척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던 중 건강 문제로 제주도를 떠나 육지에서 전도활동을 했고, 건강을 회복한 후에는 1914년 광주북문안교회(광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1920년에는 전남노회장이 되었으며, 1921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총회장을 마친 후 이기풍 목사는 고흥읍교회, 제주성내교회 등을 담임했고, 1933년에는 순천노회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우학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해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하였다. 일제는 이 목사에게 미국 스파이의 누명을 씌워서 1940년 11월 여수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때 순천노회 소속 17명의 목사와 함께 심한 고문을 받았다.
노령의 목사가 고문으로 병을 얻어 고생하자 일제는 보석으로 석방했으나, 이 목사는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2년 5월 31일 마지막 성찬식을 거행하는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6월 21일 주일 아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1942년 7월 22일자 기독교신문 보도 내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