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문화유산 제42호로 등록된 강경성결교회 옛 한옥예배당. 6·25 당시에 폭격을 맞았으나 다행히 불발탄으로 건물 일부만 파손됐었다.

결코 굴복할 수 없었던 순교신앙의 영예

신사참배와 역사 말살 맞서 민족 미래 밝혀…
다양한 교파 신앙공동체 담대한 저항 이어가

위기가 닥치면 불길과 연기가 올라가던 강경 옥녀봉의 봉화대가 그날에는 침묵했다. 수도 서울에는 국군의 수복으로 환호성이 울려 퍼지던 날, 이곳에서는 거꾸로 비명과 고함이 동네마다 메아리쳤다.

▲ 강경제일감리교회 근대역사전시관에 소개되어있는 강경 일대 순교자들의 기록.

총칼에다 몽둥이, 죽창까지 사용가능한 모든 도구들이 학살에 동원됐다. 퇴각을 앞둔 인민군들은 분풀이의 상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표적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극한 상황에서조차 성도들은 의연하고 당당했다.

병촌성결교회에서만 이틀 동안 순교한 사람들의 숫자가 여자 39명, 남자 27명이었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 숫자와 각각 동일하다. 그래서 합친 수가 66명,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한 그 숫자가 이곳에서는 무엇을 완성했을까?

총회역사위원회 일원으로 오늘 여행에 동행한 임근석 목사는 순교기념탑 주변을 거닐며, 평소와 다르게 말을 잃었다. 임 목사가 섬기는 완주 제내교회도 전쟁 당시 두 사람의 순교자가 났고, 그들의 순교기념비가 교회당 앞에 서있다. 거리상으로도 서로 가까운 이 교회에서 임 목사는 남다른 유대감을 느끼는 듯 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의 첫 보금자리에 2009년 복원된 초가예배당.

너른 들과 커다란 포구를 가진 강경은 예로부터 살기 좋기로 이름난 동네였다.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어, 한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방방곡곡에서 온갖 산물들이 집결하는 가운데 천국 복음도 이 고장에 스며들었다.

가장 세력이 컸던 감리교회들 뿐 아니라 침례교회 성결교회 등 여러 교파의 신앙공동체들이 하나 둘씩 금강 변과 옥녀봉 주위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온 겨레가 좌절과 아픔을 겪던 시기에, 압제에 저항하고 희망을 불어넣으며 동족의 가슴 속으로 깊이 동화되어갔다.

강경제일감리교회처럼 수많은 교육기관들을 세워 인재들을 양성하고 계몽하며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경우도 있었고, 강경성결교회와 같이 일제의 신사참배와 역사 말살에 앞장서 맞서며 의기를 불태우는 사례도 나타났다.

▲ 옥녀봉 정상에 건립된 강경 중앙감리교회의 순교자 안순득 여사의 추모비.

특히 강경성결교회 백신영 전도사의 주도로 강경보통공립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1924년 10월 10일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기록된다. 백 전도사는 이후 벌어진 상애어린이단의 일본 역사교육 거부사건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일제의 강경 일대 교회들에 대한 탄압은 마치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일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았고, 주일학교 교사이자 학교 훈도였던 김복희 선생은 면직처분을 받았다. 강경성결교회 또한 훗날 폐쇄의 아픔을 겪는다.

강경침례교회의 경우는 그 시절 더 심한 탄압에 직면했다. 옥녀봉에 세워진 신사 곁의 강경침례교회 예배당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일제는 침례교단 지도자들을 협박하고 회유해 예배당을 빼앗고, 기어이 불을 질러 소실시키고 만다.

기나긴 암흑의 시대가 지나고 해방이 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어둠이 도래했다. 6·25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도 그랬듯,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치하가 되어서도 강경의 기독인들은 좀처럼 기죽지 않았다.

강경성결교회는 인민군 지휘부의 코앞에서조차 담대하게 전쟁기간 내내 단 한 차례도 주일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강경침례교회 이종덕 목사는 피난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명함을 커다랗게 만들어서는 인민위원회나 내무서 등을 찾아가 보여주며, 인민군들에게 전도하기까지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의 존재가 어쩌면 인민군들에게 더 큰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그들의 손에 이종덕 목사는 금강 변 갈대밭에서, 중앙감리교회 안순득 속장은 야산에서 목숨을 잃고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다.

▲ 66명의 순교자들을 추모하며 병촌교회와 성결교단이 건립한 순교기념탑.

가장 큰 비극은 앞서 보았듯이 병촌성결교회에서 벌어졌다. 인민군의 공공연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성도들은 순교의 길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강경성결교회에서 전도사 시무 당시 병촌성결교회를 개척했던 이태식 목사도 평양에서 목숨을 잃었다. 같은 순교자의 영예를 얻은 목사와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서 헤어졌어도 천국에서 반갑게 조우했으리라.

1989년 세워진 병촌성결교회의 순교기념탑은 길을 지나는 누구라도 볼 수 있을 만큼 우뚝 서있다. 그렇지만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만이 그 탑에 새겨진 우봉춘 홍성녀 정수일 등 66명의 소중한 이름들을 읽어낼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탑 바로 곁에 묻혀있는 순교자의 묘소들과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회고하는 여러 흔적들도 발견할 수 있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들이 걸어간 길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들이 목숨을 잃고 대신 얻은 게 무엇인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누리기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이 땅에서 완성했는지.

▲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도화선이 된 강경성결교회의 최초 신사참배거부선도 기념비.

첫 번째로 찾아갈 곳은 강경제일감리교회(윤석일 목사)이다. 1901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이 교회는 예배당 안에 두 개의 역사전시관을 갖췄다. 특히 2011년에 개관한 근대역사전시관은 한국 근대사와 충남 일대 교회사 그리고 강경에서 일궈온 복음의 결실들과 순교사적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어, 순례자들이 강경 답사를 시작하며 개괄학습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장소를 강경성결교회(최낙훈 목사)로 옮기면 예배당 앞에서 거대한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전국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2006년 건립된 이 조형물에서 어린 학생들과 교사들이 꿋꿋이 믿음을 지키고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담은 부조와, 박해받던 시절의 교회를 상징하는 물고기 형상의 조각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교회당 안에서 백신영 전도사를 비롯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및 일본 역사교육 거부운동 주도자들의 면면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본 후, 옥녀봉 자락을 향해 가다보면 옛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었던 한옥건물을 마주친다.

남녀 출입구가 각기 다른 형태이면서, 내부는 전체적으로 정사각형 구조에다 보를 십자가 형태로 배열한 구조로 역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건물 맞은편 담장에는 이 교회당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을 벽화로 소개하고 있다.

길을 계속 따라가 옥녀봉 정상에 오르면 강경침례교회(김종완 목사) 첫 예배당 터가 나타난다. 파울링 선교사 부부와 한국인 최초의 침례교인 지병석씨 가족이 함께 예배했다는 이 터에는 침례교단의 지원으로 예전 초가교회당이 복원되었고, 현재 향토유적 제38호로 지정되어있다.

이곳에서 6·25 당시 순교한 안순득 여사의 추모비까지 확인하고 봉우리 아래로 내려와 강경젓갈시장으로 향하자. 시장 한가운데 위치한 현재의 강경침례교회당 안에는 순교자 이종덕 목사의 행적을 비롯한 역대 교회 지도자들의 자랑스러운 면면이 소개되고 있다. 발걸음을 금강 변으로 옮겨 갈대밭을 걸으며 이종덕 목사의 순교기념비도 들러볼 일이다.

마지막 방문지는 강경읍내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논산시 성동면 병촌리에 위치한 병촌성결교회(윤영수 목사)이다. 우리나라 성결교단의 대표적 순교유적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교회에서는 66인 순교기념탑과 일부 순교자들의 유해를 평장한 묘역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병촌성결교회는 지난해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순교 및 안보교육관, 묵상공원 등을 조성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우리가 계승해야 할 순교신앙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순교정신 계승·보존 노력에 깊은 감명

▲ 병촌성결교회 순교공원을 걸으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에 대해 묵상하는 임근석 목사.

폭염 속에 찾아간 강경의 모습은 그 동안 알던 젓갈의 고장 대신 거룩한 순교의 성지로 새롭게 다가왔다.

6·25 전쟁기간 66명의 성도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병촌성결교회가 첫 방문지였다. “예수를 믿으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위협과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읽어가면서 믿음의 후배이자 목사인 스스로에 대해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강경성결교회에서는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에 대한 사적을 전해 들었다. 역사적인 사건을 주도한 인물들이 교회 집사들과 주일학교 학생들이었으며, 면직을 당하고 퇴학처분을 받는 불이익을 감내하면서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은 존경심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일제의 신사참배 확대 정책을 적어도 1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이들의 희생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순교정신의 맥을 잇고, 훗날 일어난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위대한 순교자들의 사적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의 보혈이 한국교회의 거룩한 순교 제물들을 적시며 흐르고, 그에 힘입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든든히 세워졌음을 새삼 확인하며 마음을 여미었다. 교우들을 이끌고 강경을 다시 찾아와 순교신앙을 배워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한편으로는 다른 교단들에서 순교자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유산을 보존하는데 무척 열심인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뒤늦기는 했지만 우리 총회가 역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역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귀한 사명 성실히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임근석 목사(완주 제내교회)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