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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순교유적지를 가다 (1)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 253명의 순교자 존영이 벽면을 가득 채운 전시실.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나지막이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갈 힘을 새롭게 얻는다.

침묵으로 증언하는 순교신앙의 함성

1989년 개관 이래 참신앙 교육의 장소로 활용…500여 순교자에게 새 힘을 얻다

비탈길이다. 그리 가파르지는 않아도, 목표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마주치는 마지막 경사는 숨을 가쁘게 한다. 그런데 오르막 주변에서 뜻밖의 응원이 느껴진다. 좌우에 도열한 수십 개의 순교자 기념비, 그것이었다. 구름같이 허다한 예수의 증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는 순례자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명예의 전당과도 같은 존재이다. 여기에 이름을 올린 500여명의 순교자들은 시대를 관통하며 조국교회에 늘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는다. 주기철, 손양원, 이기풍, 문준경, 양용근, 신석구, 조만식, 박관준. 믿음이 약해질 때, 교회가 흔들릴 때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 순교자기념관에 전시된 옛 순교자들의 유품과 각종 전시물들.

기념관의 진입로를 어떤 화려한 장식이나 조경이 아니라 소박하고 밋밋한 십자가, 그리고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투박스런 돌쩌귀들로 꾸며놓은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주님처럼 순교자들도 더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더 많이 버리고 잃어서 빛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네요. 더 잘 살아야겠다고 반성하며, 믿음으로 감당하는 고난과 헌신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반드시 교회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첫 여행에 동행한 손원재 장로(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장)는 깊은 감명에 젖어들었다.

맑디맑은 용인 금박산 자락에 1989년 개관한 이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 성도들과 다음세대들에게 진정한 신앙을 가르치는 산교육의 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역할을 해왔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는 중세 교부 터툴리안의 글귀를 이처럼 생생하게 증언하는 공간이 또 어디 있을까.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진입로를 장식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기념비들. 천국에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응원을 여기서부터 느낄 수 있다.

건물에 들어서기 전, 왼편에 설치된 주기철 목사와 박관준 장로의 추모비에 먼저 눈길이 간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온 몸으로 거부하다 차례로 목숨을 잃었던 두 사람의 이름은 사이좋게도 이 자리를 나란히 지키고 있다. 천국에서도 그들은 누구보다 절친하지 않을까.

이 땅에 일어난 개신교 최초의 순교사건인 토마스 목사의 대동강 사적을 묘사한 대형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지는 중앙홀에는 하늘에서부터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자연채광을 활용한 건축구조는 다소 무겁고 음울할 수도 있었던 기념관 실내에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침묵이 가장 좋은 관람법입니다. 요청하시는 분들에게는 따로 해설도 해드리지만 그보다는 느리게 걸으면서 전시물을 손수 하나씩 살펴보시라고 권해드립니다. 훨씬 은혜가 되실 겁니다.” 안내자의 차분한 음성을 들으며 발걸음을 위쪽으로 옮긴다.

나선형으로 설계된 계단을 따라 걷다 보면 초기 한국교회의 풍경을 담은 혜촌 김학수 화백의 작품들 4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다른 문물과 사상에 대한 적개심이 과잉이던 시절, 갖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이들의 의연한 모습과 저 유명한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등이 화폭에 담겼다.

순교의 뜻을 형상화 한 여러 예술품들과 함께 영광 염산교회, 영암 구림교회, 논산 병촌성결교회 등 주요 순교사적지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도 감상할 수 있다. 예배실에서는 순교자기념관의 탄생 배경과 한국교회 대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20분짜리 영상물이 상영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르는 3층의 순교자 전시실. 설레는 기분 탓이었을까. 전시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순간적으로 눈이 부시며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 말기인 1893년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난 한국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자 첫 번째 순교자 백홍준 장로를 시작으로,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을 잃은 배형규 목사까지 253명의 순교자들 존영이 두 개의 전시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죽음으로 진실한 신앙을 입증하고, 순결한 인생을 완성한 그 이름들을 하나씩 낮은 음성으로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순례자들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다. 쉽사리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지만 이들이 생전에 사용했던 성경과 소장품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짧고도 길었던 관람 일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퇴장 직전, 출구에 걸린 거울의 글귀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나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 그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손원재 장로는 슬픔인지 기쁨인지 알기 힘든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념관 운영 책임자로 오늘의 여정을 이끌어 준 정한조 목사가 작별 인사와 함께 결론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날 우리는 피 흘리는 순교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다 모욕과 수난을 당하는 ‘백색 순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소리 없는 피 흘림의 삶이 우리의 삶과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힘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어떤 곳인가?

“한국교회 종착역과 같다”
초창기 선교현장 기록사진까지 보유, 역사적 가치 커

▲ 경기도 용인에 건축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경. 순교신앙을 한국교회 후세들에게 전수하는 산실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뜻을 모아 일으킨 사업들 중 하나가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취지에 공감한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경기도 용인 소재 땅 11만 평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에 기증했고, 바로 이 자리에 5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1989년 11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이 건립됐다.

건평 366평의 3층짜리 건물 안에는 중앙홀 전시실 예배실 세미나실 등이 들어서 있으며, 주변으로는 ‘십자가의 길’이라 불리는 산책로와 야외무대가 조성되어있다. 이 건물은 1990년 숲 속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선정되어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한 바 있다.

순교자 개인을 기리는 기념관들은 전국 여러 곳에 산재해 있지만,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처럼 전체 순교자들을 대상으로 건립한 경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사례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교자 관련 전시물 외에 서머빌 린튼 등 선교사들이 남긴 한국교회 초창기의 선교현장 기록사진까지 보유하고 있어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보고라는 평가도 받는다.

현재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운영 책임을 맡아, 정한조 목사와 성도들의 자원봉사를 통해 기념관 관리와 안내를 하는 중이다.

정한조 목사는 “양화진이 한국교회의 시발점으로서 의미가 있다면 순교자기념관은 종착역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순교자기념관이 한국교회를 위해 더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순교자들과 관련된 콘텐츠 개발에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관람은 주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가능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문의 (031)336-2825.

 

“신앙 선배들의 값진 희생 배워야” 

▲ ‘나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는 글귀가 새겨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손원재 장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방문하면서 깊은 감회와 함께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기리는 기념행사는 열면서, 왜 복음을 위해 피 흘려 순교한 분들을 기념하는 날은 따로 마련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신앙의 세대계승이 잘 되지 않고, 가나안교인 증가라는 기현상까지 생겨난 우리 시대에 신앙 선배들의 순교신앙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부흥하며 세계선교에 앞장설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들이 보여준 희생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앞으로 순교신앙 회복을 위한 선양 기간을 지정하고, 기념예배를 비롯해 순교유적지 탐방교육이나 학술세미나 등 다양한 사업들이 우리 총회 내에서 추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순교자기념사업부에서는 6월 마지막 주를 순교자기념주간으로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최근 총신신대원생들이 단체로 기념관을 견학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총신양지캠퍼스 내 소래교회당과 함께 신앙유적지 답사 코스로 개발해 전국 교회가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는 소망도 생겼다. 앞으로도 순교신앙의 계승이 한국교회의 살 길이며 앞으로 나아갈 길임을 직시하며, 여기에 일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손원재 장로(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장)

정재영 기자  jyjung@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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