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아픔과 긍지
한국전쟁 당시 뼈아픈 순교상처 곳곳에 … 영암지역 교회 협력, 순교 신앙 계승 진력

▲ 영암읍교회와 상월교회 마당에 각각 건립된 순교기념비의 모습.

월출산의 고장 영암을 지나다보면 요즘 들어 관광객들이 부쩍 많이 찾는 왕인박사유적지 부근에서 커다란 무덤 하나를 목격할 수 있다. 한 날 한 시에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28명의 유해가 나란히 묻힌 이 묘소는 6·25가 이 땅에 움푹 패어놓은 상흔 중 하나이다.

이 무덤에 얽힌 사연은 묘소에서 약 1km 떨어진 영암군기독교순교자기념관(이사장:김덕중 목사)에 전시된 한 장의 그림 속에 담겨있다. 조그마한 초가 사방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바깥에서는 인민군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고, 집안에 갇힌 사람들은 최후를 직감한 듯 서로 얼싸안고 있거나 눈을 감고 찬송을 부르는 모습의 그림이다.

▲ 영암 일대의 순교사적을 기리기 위해 지자체와 지역교회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영암군기독교순교자기념관.

실제 사건은 1950년 10월 5일의 일이었다. 점령군에서 졸지에 패잔병 신세가 된 무안 일대의 빨치산이 월출산으로 은신처를 옮기면서 반대세력에 피의 보복을 한 것이다. 먼저 구림교회당을 불태운 이들은 교인과 우익인사 28명을 색출해 인근의 초가 주막으로 몰아넣었다.

주막 주변에 섭나무를 둘러쌓은 후 불을 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아우성에 섞여 ‘내 주를 가까이’를 부르는 찬송소리가 새어나왔다. 김정님 노형식 장성례 집사를 비롯한 성도 19명의 목숨이 그 속에서 스러져갔다. 그 중에는 아직까지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이들도 있다.

.▲ 영암지역 87명 순교자들을 추모하며 구림교회 성도들의 합동묘소 옆에 세워진 순교기념비.

사건이 있고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현장을 찾아가 잿더미 속에서 유해들을 수습하고 합동묘를 만들었다. 1974년에는 무덤 곁에 ‘순절비’가 세워졌고, 2000년이 되어서야 이들처럼 전쟁 중에 순교한 87명의 이름을 새긴 순교비가 건립됐다. 그리고 올해에는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라는 명칭을 단 또 다른 비석의 제막식이 열릴 예정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에 대해 시대마다 다른 해석과 의미부여를 담은 비석들이 묘역 주변에 세워지고 있지만, 영원한 기념비는 단 하나 뿐이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새겨진 이들의 이름은 두고두고 빛날 것이다.

화염 속에 무너졌던 구림교회당은 재건되었고, 앞선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그 후예들은 순교신앙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 현재 구림교회를 담임하는 김경원 목사와, 교회당 곁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최태진 장로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19명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 6·25 당시 순교한 구림교회 성도들과 우익인사 등 28명의 유해가 합장된 묘소. 순절비와 순교비가 나란히 건립된 이 묘역은 영암의 대표적 순교유적이다.

순교유산은 구림교회만 물려받은 게 아니었다. 영암읍교회에서는 김동흠 장로를 비롯한 24명의 교인들이 4차례에 걸쳐 희생됐다. 빨랫줄로 사용하던 철사를 사람들의 손바닥에 꿰어 줄줄이 야산으로 끌고 가서는 학살했다는 그 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오호라, 겨레의 어둠의 날. 6·25 이십사 성도여, 주님오실 때까지 고이 기다리시라’는 비문에 담겨 여전히 생생하다.

상월그리스도의교회에서는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10월 하순 어느 날, 이홍길 장로의 집으로 소집된 성도들은 인근 둔벙으로 붙잡혀가 죽창과 칼로 살해당했다. 죽음에 직면해서까지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눈 이들을 향해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들의 담대한 신앙이 지금도 교회 안팎에서 회자된다.

이밖에도 매월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기독교인을 처형하는가 하면 15살 어린 소녀까지 희생되는 일이 발생했고, 서호교회에서는 해남에서 목회하던 노홍균 전도사가 고향에 왔다가 빨치산에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영암읍교회에는 1953년 당시 함태영 부통령의 친필 휘호를 전달받아 순교비가 건립됐고, 상월교회에서도 1992년 3월에 당시까지 밝혀진 순교자 25명의 이름으로 순교비를 세웠다. 두 교회 모두 예배당 마당에 순교비 주변을 특별한 공간으로 조성해 기념하고 있다.

2005년에는 영암군교회협의회(현재 영암군기독교연합회) 주도로 영암군의 지원을 받아 군서면 동구림리에 영암군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세우고, 각 교회의 순교사적을 소재로 한 회화작품들과 각종 유물 등을 전시하는 중이다. 기념관 관람과 전시해설은 구림교회에 문의하면 된다. (061)472-0232.

해마다 6월이 되면 이 기념관에 영암지역 온 교회가 모여 순교자추념행사를 열고, 조국과 교회 그리고 순교자 유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선인들의 신앙을 계승하는 기회를 갖는다. 올해에도 영암군기독교연합회(회장:강춘석 목사) 주최로 전동평 영암군수와 이하남 영암군의회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예배와 추모식이 진행됐다.

특히 기념관 개관 초기부터 영암군교회들과 교류하며 협력해 온 부산광역시기독교총연합회는 올해 행사에도 회장 박성호 목사가 설교자로 참여하여 우의를 나타냈다. 동해를 바라보는 도시에서 서해가 지척인 이 작은 마을까지 꾸준히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암의 순교사적이 영암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암과 부산이 함께 하고, 영남과 호남이 나누며, 결국에는 남과 북 그리고 조국교회 모두가 기억해야 할 아픔이고 자랑이기 때문이다.
 

▲ 영암지역 여덟 교회의 순교사적을 묘사한 회화작품들.(영암군기독교순교자기념관 소장)

전남지역은 6·25 전쟁으로 인하여 순교자가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영암은 어느 지역보다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는 교회들이 많다.

전쟁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중부지역을 장악하자, 호남지역에 주둔하던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지역의 기독교인과 주요 인사들을 학살하고 도주하였다.

영암군에서도 수많은 교인들이 북한군에 의해 순교하였다. 오직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영암지역에서 87명의 교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호남지역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93년의 일이다.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7인의 선교사들이 호남지역 선교를 시작하며 전주에서부터 복음이 뿌려지기 시작한 이래, 1897년에는 목포지역에 선교사가 들어가서 사역하기 시작했고 1904년에는 광주지역, 1913년 순천지역으로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영암지역에는 목포선교부 니스벳(John Samuel Nisbet, 한국명 유서백) 선교사가 1915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영암읍교회가 세워졌다. 사실 영암은 목포에서 가까운 지역이지만 주변의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복음이 늦게 전해졌다.

니스벳 선교사는 1869년 미국 남캐롤라이나주 행케스터에서 태어나 1898년 노스웨스트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1907년 38살에 선교사로 지망하고 내한하여 전주에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1911년에는 목포 선교부로 와서 사역하는 중 1915년에 영암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이다. 해방 이전에 영암 일대에는 17개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6·25 당시 공산군에 의해 19 50년 9월말부터 10월 사이 많은 주민들과 교인들이 학살되기 시작했다. 특히 영암군내 8개 교회에서 성도들이 공산군에 의해 순교 당하였다. 영암읍교회 24명, 구림교회 19명, 상월그리스도교회 30명, 천해교회 6명, 매월교회 3명, 삼호교회 2명, 독천교회 2명, 서호교회 1명 등 총 87명이 순교한 것이다.

영암군기독교연합회는 2000년에 87인 순교자기념비를 세웠으며, 2006년에 군의 지원을 받아 군서면에 영암군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세웠다.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순교 씨앗으로 세워진 영암 교회들
‘순교자 피는 교회의 씨앗’ 명제 증거하다

짓밟히고 억눌리면 망하는 게 세상의 이치이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부수고 죽이고 불태워도 살아남고 더욱 단단하게 자라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영암 삼호교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6·25 당시 목포양동교회 김제환 장로의 아들인 김상규씨는 전쟁 중에 친구와 삼호면 용당리를 찾아왔다가 인민군의 추격을 받는다. 바다로 뛰어둔 두 사람 중 친구는 인민군의 총격으로 먼저 숨지고, 상규씨는 붙잡혀 고문을 당한 후 인근 저수지에서 몸에 돌을 매단 채 죽음을 당한다.

상규씨의 시신은 기독신문 총무국장을 지낸 박영종 장로의 부친이 인양해 임시로 매장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제환 장로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서, 6년이 지난 후 아들의 순교를 기념해 세운 교회가 오늘날 커다란 신앙공동체로 자란 삼호교회이다.

천해교회도 비슷한 경우이다. 이홍길 장로의 가족 등 상월교회 순교자 유족들이 6·25가 끝난 후 학산면 천해마을로 이주해 천해교회를 설립했다. 순교한 조상들에 대한 긍지가 가슴 깊이 간직된 교회이다.

낙지거리로 유명한 학산면 독천마을에는 전쟁 후 5년이 지나 독천교회가 세워졌다. 본디 전신격인 월창교회가 인근 미암면에서 사역하고 있었으나, 6·25 중에 예배당은 신축 2년 만에 불타버렸다. 당시 청년회장을 맡고 있던 정성길 성도와 주일학교 학생이던 안안심 소녀 등이 순교하는 일까지 벌어져 교인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세운 교회가 독천교회이다.

이처럼 영암 일대에는 순교자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세워진 교회들이 적지 않으며, 이들은 그 역사를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터툴리안이 말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명제의 증거들을 영암에서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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