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 글을 쓰기가 부끄럽다. 한국교회 공적 사역과 생태계 복원 사역을 한답시고 교단의 사활이 달려 있는 은급재단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난 6월 3일 총회임원회 때 김종준 총회장께서 우리 교단에 속한 시골교회나 미래자립교회 목회자들이 교단을 탈퇴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왜냐면 시골교회나 미래자립교회에서는 은퇴비를 드릴 수가 없고, 교단 정년법에 의하면 70세에 은퇴를 하기 때문에 은퇴를 안 하기 위해서 교단을 탈퇴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총회는 점점 쪼그라들게 될 것이다.
세계교회, 특히 미국교회의 변화적 흐름을 보면 1970년대까지는 교단 중심의 전통적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너무 교단 중심적인 흐름으로 가다보니까 1980년대부터 교단의 제도와 간섭으로부터 탈피하는 커뮤니티교회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교회는 개교회 중심을 이루며 새로운 예배 스타일, 곧 구도자 중심과 문화적 예배를 드리는 부흥 코드로 성장을 해 왔다. 그렇게 하다 보니 교단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 교회 목회자 중심의 공동체교회가 되었고 그런 대형 공동체교회 목회자들 간의 영향력 전쟁이나 스타플레이를 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처치 플랜팅(Church Planting)이라는 말을 아는가. 옛날에는 ‘교회개척학’이란 용어로 쓰여졌다. 그런데 지금은 광의적인 의미에서 ‘교회세움’이라는 말로 쓰인다. 즉 다시 교회 안에 성장 동력을 일으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력으로 지교회를 개척한다든지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공적교회까지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처치 플랜터가 되어야 한다.처치 플랜터는 부르심의 감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라고 하
우리 교단은 칼빈주의 보수신학과 개혁신학를 지키고 계승해온 견고한 보수교단이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게 제도적 보수, 형식적 보수, 문화적 보수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설교도 예배도 시대 흐름과 변화를 간과하는 우를 범할 때가 있다. 개혁신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절대은혜를 강조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향하여 가고 성경으로 개혁을 하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우리는 제도로 너무 굳어 있다. 제도가 화석화 되어가고 설교도 바르게만 하려고 하지 청중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꿈틀거리게 하는 힘이 부족하다.
총회는 칼빈주의 보수신학을 생명처럼 지켜온 교단이다. 더구나 적통성에 있어서도 그렇고 크기에 있어서도 장자교단이다. 이런 명실상부한 장자교단이 되었으면 당연히 장자 역할을 해야 한다. 옛날 장자는 아버지를 대신하였다. 아버지가 죽었거나 멀리 출타를 하면 장자는 모든 형제들의 으뜸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 역할을 한 것이다.그런 장자 역할을 우리 교단이 해야 한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까지 총회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장자교단 역할을 할 것인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총회 내부의 운영을 놓고 회의를 하거나 그것 때문에 옥신각
총회도 사람이 모인 곳인데 어찌 정치가 없겠는가. 그러나 너무 정치총회, 금품총회가 되다보니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도입했다. 그러자 외형상으로는 클린총회가 되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정치권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함량미달의 후보들이 너도나도 출마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총회 문턱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분들이 총회 지도자가 되면서, 교단의 정치 질서가 무너질 뿐만 아니라 교단 발전의 장애요인이 되었다. 그런 풍토가 계속되면서 교단 발전을 위한 장기 계획보다는 매 회기 때마다 일회성 사업에 연연하게 되었다. 1500명이
우리 교단은 여러 면에서 장점과 저력이 많다. 특히 지난 100년간 지켜온 보수신학과 개혁신학의 전통은 최고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장로교 총회의 적통성을 계승해왔을 뿐만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최대 교회수를 이루어 한국교회 장자교단이 된 것 역시, 우리 총회의 자랑이고 자존심이다.그러나 우리 총회의 현주소를 짚어보면 많은 문제점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성 총회가 지나치게 정치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만 있고 정책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총회가 정치화되다 보면 선거를 앞두고 정책과 공약에 집중하기 보다는 상대후보의 약점
어느 조직이나 단체건 역사의식이 부족하면 지난날 고난의 역사를 망각하고 기득권 싸움과 사익만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역사의식은 초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초심이 있으면 역사의식이 있고, 역사의식이 있으면 역사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고난의 역사를 기억한다. 그런데 역사의식이 없으면 도전과 응전의식이 없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고 싸우다 망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단도 한동안 역사의식이 없으니까 미래에 대한 정책이나 대안보다는 정치 총회로 표류했다. 언제부턴가 우리 총회도 1층에 역사자료실을 만들어 놓은 것은
몇 년 전 광나루에 있는 장신대 신대원 집회를 가서 학교 시설을 관람하다 역사기념관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고 입이 쩍 벌어진 적이 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에서부터 사무엘 마펫, 찰스 클락, 스완론 선교사 등 모든 역사자료와 도서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양신학교 역대 교장들 사무엘 마펫, 스테시 로버트, 채필근, 김인준 등의 이름과 당시 한양과 평양의 선교현장과 상황을 담은 사료들이 가득한 것이다.통합측 총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도 역사자료실이 엄청나게 넓고 많은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통합측은
우리 총회는 오로지 칼빈주의 보수신학, 즉 개혁신학의 순수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모든 부동산과 유지재단 등을 다 포기하고 허허벌판에서 시작하여 눈물겨운 교단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신학적 퓨리티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순수함만을 앞세우다보면 분리주의자가 될 수 있다.우리 총회가 매킨타이어를 배격한 것은 그가 너무 분리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학적 순수성을 지킨다고 분리주의자가 되면 안 된다. 우리 총회는 장자교단이라고 한다. 장자는 동생들이 잘못된 길로 가도 아우르며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
우리 교단은 오로지 칼빈주의 보수신학과 개혁신학 하나만을 위하여 분열의 아픔을 겪어왔다. 그렇다면 허허벌판에서 오늘의 총신을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진들이 땀과 눈물이 흘렸겠는가. 그래서 과거에 교단의 선진들은 총신을 생명처럼 여겼다. 그리고 총신의 신학자들을 섬기고 지켜 주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우리의 총신은 정치의 장이 되기 시작했고 교권 세력화의 각축장이 되었다.한 사람의 지나친 욕망은 또 다른 패착을 불러왔다. 독 안에 든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하마터면 독이 깨질 뻔한 실수를 범할 뻔 한 것이다. 마침내 총신에
우리 교단은 신학적 순수성 하나 때문에 1953년 기장측과 분리를 감행했다. 김재준 박사의 문서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9년에는 WCC문제를 놓고 혼합주의를 반대하고 순혈적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나눠졌다. 모든 유지재단과 부동산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순수한 신학을 지킨 것이다. 그 신학은 보수주의 신학이고 칼빈주의 신학이다. 오늘 우리 표현으로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의 재산은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그런데 보수주의 신학의 한 중심에는 박형룡 박사가 있었다. 그리고 성경신학
필자는 처음에는 합동 측과 개혁 측의 합동을 반대했다. 합동 측과 개혁 측이 하나 되면 총신을 제대로 다녀야 되고 심지어는 당회장권까지 빼앗기고 임시목사로 다녀야 한다는 괴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런 가짜뉴스와 헛소문에 놀아났던 것이다. 게다가 합동 측의 큰 어른이시자 초교파 활동도 많이 하신 두 어른을 찾아뵈었더니 그 분들께서도 합동과 개혁은 절대로 하나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합동을 반대했다.오히려 광신대에 내려가서 광신대 총장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합동을 놓고 기도하는
1979년 합동 주류와 비주류가 나뉘어진 이후로 분열은 계속되었다. 합동 주류도 합신으로 나뉘고, 비주류는 더 많은 분열을 거듭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분열이 장로교 안에 수많은 군소교단을 양산해 내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안 교단의 지도자들, 한병기 노진현 정규오 목사는 합신과 합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교단 헌법 수용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서 무산이 되고 말았다.그러자 정규오 목사가 합신은 제외하더라도 합동과 개혁측이라도 하나가 되자고 제안을 했다. 정규오 목사가 지난날 분열의 과오를 반성하고 책임감을 느껴 다시 하나
나는 하나님이 주신 불붙는 소명감으로 인해 불교와 유교에 완고하신 부모님의 극심한 핍박을 받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때 내가 다니던 교회는 대구동부교회에서 열린 64회 총회 때 분리된 비주류교단에 속한 교회였다. 교계 기자들은 비주류 교단을 합동보수라고 칭하였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물론 하나님의 인도였지만) 광주신학교 대학부를 가게 되었다.그때 4년 동안 신학교를 다니면서 채플시간에 개인의 영성, 뜨거운 소명감, 첫 사랑과 초심, 깊은 영성 등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대부분 교단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설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