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와 1970년대 영국교회의 두 거성이 있었다.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였다. 그런데 1966년 당시 런던목회자협의회 회장이었던 존 스토트가 목회자 세미나를 하면서 로이드 존스를 주 강사로 세웠다. 그 때 주제는 ‘교회란 무엇인가’ 였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 교회란 자유주의 교단과 함께 설교를 하거나 어떤 집회를 같이 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면 복음과 신학은 절대로 섞이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러자 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의 강의가 끝난 후 나와서 이렇게 혹평을 해 버렸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강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건국의 정신과 초심을 지키느냐, 잃어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고려는 왕건이 자주와 애민의 정신과 초심으로 시작했지만 훗날 권문세족들이 사리사욕만 부리다 망했다. 그래서 정도전이 민본의 정신과 초심으로 이성계를 앞세워 조선을 건국했다. 그러나 다시 사색당파와 붕당정치에 빠져 당리당략 싸움만 하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우리 총회도 마찬가지다. 1959년 WCC 가입문제를 놓고 신학의 순수성과 순혈성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분리를 감행했다. 여기엔 51인 신앙동지회와 정규오 목사 신학사상이 중심이 되
정말 이영수 목사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탁월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우리 교단 발전에 이영수 목사를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찌 과가 없었겠는가. 그는 52회 총회 회록서기부터 시작해서 65회 총회장에 이르기까지 14년 동안 총회 임원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는 1인 독주정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장로회 정치원칙을 위반했다는 견해가 많다. 물론 정규오 목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분 역시 10여 년을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특별한 시대상황에서 이러한 형태를 이해해야
이영수 목사는 교단과 신학교를 생각할 때마다 미래지향적 사고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대를 멀리 보고 넓게 봤다. 사당동 총신으로는 세계적인 신학교로 발전하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부도 행정상 지방분산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신대원 부지를 물색하던 중 경기도 양지에 있는 23만평 땅을 알게 된 것이다.당시 그 땅은 군산시에 있는 백화소주 사장 강정중 씨 소유였다. 그 땅에 백화소주 공장을 지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소주공장을 만들려면 물이 나와야 하는데 물도 안 나왔다. 회사의 채무를 갚으려고 하던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영수 목사는 모친 정성금 권사로부터 헌신적 신앙을 이어받고 이원영 목사로부터 꿈과 비전, 정치적 리더십까지 배웠다. 그리고 그는 대구봉산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당시 증경총회장이던 양화석 목사의 주선으로 1969년 대전중앙교회에 부임했다.이영수 목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필자도 개혁측에 있을 때 이영수 목사에 대해 정치꾼 중의 정치꾼, 즉 속물적 정치꾼으로만 알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당시 개혁교단은 정규오 목사와
1970년 당시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사당동 총신을 매각해서 양평이나 광주로 가려했던 것은 상황적 최선의 판단이었음은 분명하다. 더 광활한 캠퍼스에서 세계적인 칼빈신학과 개혁신학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때 좀 더 많은 정보력과 미래지향적 판단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 만약에 정규오 목사 사단이 경부고속도로를 낀 부지를 매입해서 신학교를 지었다면 문제는 다르다.만약에 양평이나 광주로 갔다면 오늘의 총신의 눈부신 역사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일로 총신은 1180만원을 손해 보았다. 이런 상황
1970년 초반까지 우리 교단의 리더십은 정규오 목사였다. 정규오 목사는 항상 칼빈주의와 보수주의, 개혁신학을 지키는 정치를 했다. 박형룡 박사를 떠받들고, 총신의 신학이 변질되지 않도록 정치가 신학을 보호하고 신학은 정치의 보호를 받으며 활동했다. 정치와 신학이 공존을 한 것이다.그런데 정규오 사단이 미스를 범한 것이 있다. 당시 총신 재단이사회가 극비로 사당동 캠퍼스를 1억4500만원에 매각하기로 결의를 하고 계약금 1450만원까지 받았다. 대신 경기도 광주에 땅을 계약한다. 매각을 추진한 이유는, 사당동이 개발지역이 되면서 땅
총신대의 문교부인가와 함께 총신과 교단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이때 총신 인가과정에서 김인득 장로의 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인득 장로가 석면광산을 총신 수익 재산으로 제공하고 기부체납으로 총신에 증여하는 조건으로 문교부인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총신과 교단이 발전하게 된 인프라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정치가 신학을 보호하고 정치와 신학이 공존하였기 때문이다. 정치활동은 신학에 근거했고 신학은 정치의 보호를 받고 활동을 하였다.이때 두 기둥이 있었는데 하나는 박형룡 박사였고 또 하나는 정규오 목사였다. 신학
아무리 교단이 커도 신학교가 없으면 반드시 사멸하게 되어 있다. 왜냐면 신학교는 못자리판과 같기 때문이다.백남조 장로의 헌신으로 사당동 캠퍼스 부지를 구입하자 미 6167공병대의 협조 속에 정지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일은 미군부대에서 일해 온 김상정 전도사의 노력이 중요하게 작용을 했다.정지작업이 끝나자 1965년 3월 15일 사당동 총신 부지에 500여 명의 축하객이 모인 가운데 기공예배를 드렸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다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 역사적 현장을 목도하고 가장 감격스러웠던 사람은 박형룡 박사였다.기공예배를 드리던
교회건 교단이건 생명주기이론이 있다. 생성기, 도약기, 지속적 성장기, 절정기, 정체기, 쇠퇴기, 사멸기다. 교단의 적통성과 법통성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WCC 문제로 분리가 되어 다시 시작할 때가 우리 교단의 생성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 교단은 두 가지의 기치를 가지고 똘똘 뭉쳤다. 첫째, 보수신학이 상실되어 버릴 혼란과 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보수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 맨 손으로 허허벌판으로 나와 우리 교단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두 가지의 공동 미션을 가지고 함께 초연결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이
13신앙실업인동지회 결성은 하나님이 우리 교단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13신앙동지회는 우성기 장로의 제안으로 시작된다. 우성기 장로는 당시 섬기던 대구중앙교회가 WCC를 찬성하는 통합측으로 가게 되자 WCC를 반대하는 성도들과 그 교회를 나와 서성로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그때 우성기 장로는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백남조 장로에게 개척교회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며 연보를 받는다.우 장로는 이때 자기교회만 도움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백남조 장로를 중심으로 총회의 유력한 장로들을 엮어서 총신과 총회 발전을 위하여 13신앙실업
김윤찬 목사님의 노력으로 메킨 타이어의 후원을 받아 가까스로 용산신학교 교사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안주할 수는 없었다. 용산신학교 교사가 너무 허름하고 좁았기 때문이다. 이때 대구서문교회 담임목사이자 용산신학교 교수로 섬기고 있던 명신홍 박사가 1960년 이라는 잡지에 교단신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 글을 기고했다. “전국교회가 동참해서 반드시 모금운동에 성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상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이때 명신홍 목사의 글에 감동을 받은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우성기 장로였다. 그는 자전
지난 월요일 김종준 총회장과 총회 임원들이 통합측 총회회관을 방문했다. 총회장께서 설교를 하셨고 나는 축사를 했다. 나는 이렇게 축사를 시작했다.“우리는 1959년 WCC 가입 문제로 교단이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선진들은 신학적 보수를 사수하기 위해서 WCC 가입을 반대하였고 통합측의 선진들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추구하며 WCC 가입을 찬성한 것입니다. 영국에서도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가 교회론 문제로 양분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 지금은 박살이 난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단의 선진들은 그 허허벌판에서 땀
우리 총회가 교회사의 격동 속에서도 보수주의 개혁신학을 지킬 수 있었던 중심에 51인 신앙동지회가 있었다. 신앙동지회를 이끌었던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의 을 통달했기에 어떤 자유주의 신학 사조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보수신학의 기초가 있었다. 그 견고한 신학과 영성의 토대 위에 51인 신앙동지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51인 신앙동지회를 주도한 정규오 목사 신앙의 태생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미국 남장로교 광주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김성국 장로가 전남 나주군 다도면에 방산교회를 세운다. 어린
1959년 9월에 열린 제44회 총회는 참으로 암담했다. WCC 가입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이 폭발했다. 당시 노진현 총회장의 사회로 밤을 새워 토론을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정회를 선언하고 11월에 승동교회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런데 WCC 가입을 찬성하는 측에서 일방적으로 연동교회에서 모여 가입 찬성을 가결해 버렸다.반면에 반대 측에서는 총회의 법과 절차에 따라 11월 14일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여 WCC 탈퇴를 결정했다. 연동교회측은 통합이라 불렀고, 승동교회측은 합동이라 불렀다.교단의 적통성과 법통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