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일한다고 자녀들 돌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다 키워 주셨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목회자 자녀들 중 신앙을 잃어버린 분들이 많아요.” 목사의 아들로 자라 목회자의 길을 걸어온 나는 목회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수시로 이런 말을 한다. 과연 신앙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워진 자들을 향해 개인의 책임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마땅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기관은 가정과 교회다. 창조 기사에서 가장 집중하는 부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 하면 보통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역사·철학을 지칭한다. 인문학은 대학 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 학문이다. 그러나 취업에 불리하다거나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심각하게 경시되거나 천대받고 있다. 상위권 성적의 대입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의 의대(醫大) 선호도는 압도적이다 못해 기형적이다. 서울대 인문대는 10년 전부터 신입생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인문학의 본질’을 익히는 고전(古典) 교육을 강화했다. 해마다 고전 3권을 선정해 읽고 소모임을 통해 토론을 벌이는 수업을 한다. 인문대는 인문
제22대 총신대학 총장이 지난 4월 11일 선출되었다. 학내분규사태와 3년 여 동안의 임시이사체제를 겪고 선출된 총장이며, 무엇보다도 신대원 미달 사태와 같은 학교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리더의 선출이었기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 교계 언론인은 이번 총장선거를 “잔인한 선거”로 정의하였다. 금권 선거는 물론이고, 총장 후보자들의 언론 광고나 인터뷰도 금지하고, 오직 공개적인 발전계획발표와 총장추천위원회, 법인이사회의 심층면접을 통해서만 당선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총장추천위원회의 간결하고 탁월한 진
3년간의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총회와 산하 모든 교회, 그리고 성도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교회에서 드릴 수 없는 형편에 처했습니다. 주일예배를 현장에서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눈물로 강단을 적셨고, 성도들도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가중됐습니다. 대면예배 중단으로 헌금이 줄어들고, 특히 임대료를 내야 하는 상가교회들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실제 많은 상가교회들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문을 닫았고, 성도들도 교회를 떠났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는
전국 교회들이 부활주일 감사예배를 드림으로서 올해의 부활절 행사가 마무리됐다. 교단 산하 전국교회에서는 부활절을 기념하는 부활주일 전후 사역들과 부활주일 감사예배와 축하사역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며 강조해 왔다. 특별히 올해는 우리 교단 산하 교회들 가운데서 부활주일 교육과 설교의 주제로 교단에서 강조해 온 부활신앙과 그 능력과 유익 그리고 그 신앙을 가진 자의 태도 등이 다양하게 선포되고 교육됐을 것으로 생각된다.이처럼 부활신앙을 가르치고 전수하며 감동적인 행사와 예배를 드리고 부활절을 지킴에도 불구하고 매년 많은 아쉬움을
총회는 다양한 분들이 모여 정책 입안을 하는 곳이다. 그 과정을 통해 교계를 올바르게 변화시키길 요구하는 분들이 적잖게 많다. 총회 정치는 대의를 위한 섬김인 동시에 시대적 흐름을 빨리 감지해 그에 따라 올바른 변화의 방향을 예측해 총회발전을 위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그런데 총회 정치를 하는 다수의 인사들이 자신의 명예와 이익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총회와 산하 노회와 교회, 성도들을 섬김에 대해서는 인색한 것이 현실이다. 총회 발전을 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근본적인 해결 방안과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매년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그래서 고난주간에는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한다. 또한 교회마다 ‘특새’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고난주간만이라도 새벽기도를 시작한다. 그런데 특이하게 오늘의 교회는 특새 주간이 지나면 성도들은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다. 고난주간이 말 그대로 특별한 기도주간인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후에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 세속주의가
근자에 우리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보도가 있다. 2월 8일 이후 약 2주간에 걸쳐 그치지 않고 애즈베리 대학교 채플실로 몰려드는 인파와 그들의 ‘열망의 찬미와 기도’를 보고 언론 매체들은 ‘애즈베리 부흥’(Asbury Revival)이라는 명칭을 붙여 보도했다.그리고 이를 주목하는 자들로부터 벌써 서너 가지의 엇갈린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긍휼로 부어주신 부흥이다.’ ‘아직은 아니다. 더 지켜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경계에서 더 나아가 ‘아니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부흥이 아닌 마귀적이고 모조적인 부흥의 사
이 세상에는 현자와 우자가 있다. 우자는 가르쳐줘도 모르고 현자는 가르쳐주면 아는 자다. 그런데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싹을 보고 미래를 아는 사람을 명자(明者)라고 하고, 싹이 보이지도 않지만 기미만 보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을 철인(哲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싹도 안 나고 기미도 안 보이는데 미래를 꿰뚫어 보고 예측하며 그것을 대비하는 사람을 선각자(先覺者)라고 한다.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대안을 세우는 선각자여야 한다.코로나가 왔을 때 나는 교단 부총회장으로서 몇 분의 교회사 교수들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 한국교회 지도부에
2022년 제107회 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교인 수가 전년 대비 9만59명(3.8%) 감소한 229만2745명(2021년12월31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교회 수도 전체 교인 수와 비슷한 비율(3.6%)로 줄어 1만1262개로 확인됐다. 코로나19 장기화에 결국 버티지 못한 중소형교회의 이탈 결과로 보인다.교인과 교회 수가 크게 줄어든 반면, 목사 수는 1년 전보다 691명(2.7%) 늘어난 2만6168명으로 조사됐다.(기독신문 22년 9월 25일) 이런 상황 속에서 총회와 총신신대원 간 사역자 수급 계획에 따른 마스터플랜을 시급하
최근 한국교회 강단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주제는 다음세대다. 정치, 경제, 안보, 북한 핵, 환경, 기후보다 인구절벽 문제가 더 큰 위기이기 때문이다.2월 22일 통계청 보고서에 의하면 2022년 출생한 아이는 24만9000명으로서 한 해 전에 비해 1만5000명 감소했다. 10년 전인 2012년 출생아가 48만4550명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불과 10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한 해 전인 2021년 통계 보고 때 출생율이 0.81명이라고 해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데, 1년 만에 0.7명대로 더 떨어졌다고 하니 더욱 염려스럽다.
졸업의 계절이다. 어김없이 우리 총신에서도 졸업생이 배출된다. 문득 그들에게, 우리에게 묻고 싶어진다. 뭘 가르치고 배웠는지를 말이다. 사실상 그들에게 가르친 신학과 성경지식은 지금의 세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신자본주의 태동은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생산과 이윤의 도구로 획일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에 의해 교회에도 신칼빈주의가 태동했고 신칼빈주의는 폭을 넓혀 복음주의가 됐고 복음주의는 번영신학으로 무장하여 신자본주의가 자본을 극대화하여 이윤을 추구하듯,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불씨는 한국교회 초기에 있었던 1903년의 원산 부흥운동,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 발표 통계에서 한국교회 교인 수는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가 열릴 당시 300만명, 75년에 약 400만명, 1980년에 760만명으로 60년대 이후 매년 10만명씩, 70년대 이후에는 매년 60만명씩 증가했다. 2021년 인구비례 20%가 한국교회 교인수로 추정하는데 정확한 통계일까 싶다. 전 세계 50대 대형교회 중에 한국교회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것도 1위부터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 시대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인격적 교제 관계를 비대면적 소통으로 전환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와 간격을 두게 만들었다.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일이다. 코로나의 유입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마스크를 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을 기억한다. 전국적으로 마스크는 품귀현상을 보였고, 세상에는 마스크를 가진 자와 그것이 없는 자로 구분될 정도였다. 2~3년을 훌쩍 넘기면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는 것이 에티켓이 되고, 일상이 됐다. 집을 나서는 사람들은 가장 먼
어린 시절, 십자가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하고 두 손 모아 기도할 때가 있었다. 유년 시절의 일이다. 신앙을 물려주신 부모님과 열정을 쏟으면서 가르친 교회 선생님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감동과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 오랜 교회 생활과 연합회와 교단 총회를 섬기면서 이성적인 판단과 분석이 앞서고 일의 효율성만 따지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순수한 신앙이 사라지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한다.주일학교가 폭발적인 부흥을 하던 시절 교회를 다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