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에는 아브람이 했던 두 가지 질문이 나온다. 아브람이 조카 롯과 재물을 빼앗아 간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과의 전투(14장)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께서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고 하시자 아브람이 첫 번째 질문을 한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15:2)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며 아브람에게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고 다시 한 번 상속자(아들)를 약속하셨다. 아브람이 그 말씀을 하신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 왔는데 요즘은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킨다’라고 하면서‘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하지만 이게 누구의 책임인가를 논하다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에, ‘교회’라는 개념보다는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개혁’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본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물으셨을 때 솔로몬이 왕으로서 재판을 잘 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교인들도 교회개혁을 위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특히 좋아했던 것들을
목사의 독서는 전문성을 강화하는 독서여야 한다. 전문성 강화를 위한 연구독서는 다섯 단계를 충실히 따른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이 다섯 단계를 살펴보려 한다.첫째, ‘사실을 사실로 보는’ 독서다.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곧 직시(直視)하는 능력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 안에 먼저 자리잡은 정보와 지식은 한 사람의 관(觀)과 견해(見解)를 이루는 초석이 된다.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기는 쉽지 않다. 신학이라는 선(先) ‘입견’ 때문이다.교단별로 성경적인 신학을 추
연구독서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생각훈련, 둘째 전문성 강화, 셋째 주변학문 개념학습이다.첫째 생각훈련이다. 그 시작은 생각이 훈련의 대상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훈련하지도, 사고력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생각을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사람은 누구나 수용하며 살아간다. 보고 듣고 읽는 일상 자체가 수용의 과정이다. 사람마다 일상의 수용과 수용력은 다르다. 같이 보고 듣고 읽어도 배움의 결과는 같지 않다. 수용의 습관을 점검하고, 배우는 능력을 훈련하며,
얼마 전에 모 교단의 총회장을 지냈던 동생 같은 후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처럼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러하기에 누구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나에게도 죽을 뻔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처음에는 운전 중 정면충돌로 정신을 잃었다가 다음 날 병원에서 깨어났고, 두 번째로는 독일 마인강에서 도강훈련 중에 탑승한 장갑차(M113)가 강바닥에 가라앉는 바람에 질식사할 뻔했고, 세 번째로는 예배당에서 뇌진탕으로 쓰러져 일주일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는 많은 목회자가 선호하는 설교의 주제로,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다양한 교훈을 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율법사의 질문을 받고, 답변으로 먼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율법에 기초한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이웃’이란 같은 언약백성인 사람들만 의미했기 때문에, 이방인은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도 이웃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필자는 설교할 때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알고 선을
나에게는 자녀 둘이 있다. 아내 나이 40에 둘째가 태어났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다. 아내는 50이 되어 늦둥이를 키우려니 조금 힘에 부쳐한다. 게다가 딸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홈스쿨링 중이다. 하루 온 종일 아이들과 함께 보낸다.둘째는 활동적인데다가 성격도 만만치 않다. ‘지랄 총량의 법칙’에 대해 들어 보았는가! 인생을 살며 소비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가끔 이야기 하곤 한다. “사랑이(둘째)는 평생 쓸 수 있는 떼, 지랄을 미리 당겨 한꺼번에 쓰는 것 같다. 청소년기나 청년, 성인이
1960년대 독일의 ‘가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어느 교포가 그림 한 점을 그 당시 여의도 40평형 아파트 한 채 값을 주고 샀다. 전문가 두 사람이 감정한 결과, 17세기 스페인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구매 가격의 50배를 제시하자 그림을 팔고, 그 교포는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는 꿈같은 일이 있었다.나에게는 무엇이 꿈같은 일일까 생각하다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 중에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총신 교정 머릿돌에 새겨진 5대 교육지표다. 어느 하나라도 잊지 말아야 할 목사로서의 삶의 지향점을 제시해준다.첫째, 신자 됨이다. 목회의 출발이요 초기 값에 대한 이야기다. 목사이기 전에 신자요, 신자 됨 없이 목사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지체인 목사의 첫 번째 정체성은 신자여야 한다. ‘Back to the basics’이라 했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택함 받은 신자의 자리, 은혜의 자리를 기억해야
독서를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면 교양독서에서 학습독서로 나아가야 한다. 크리스천의 독서는 더욱 그렇다. 취미 이상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 독서는 자기만족의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사명자로 자신을 준비하는 탁월한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배움의 출발은 내용의 수용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아는 힘’을 쌓아간다. 익힘은 배움에 뒤따른다. 배움을 통해 지식이 자라고, 익힘을 통해서는 지능이 향상된다. 우리 교육의 아쉬움은 지식의 수용에 집중하는 반면 익힘의 과정에 공을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서 사용할 때가 많다.성경에서 믿음이란 ‘신실함, 신뢰, 엄숙한 약속, 증거나 보증’을 의미하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한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이다.(요 14:1)중학교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완행열차를 타고 광주로 갔다. 아버지는 여느 승객과 달리 다음날부터 시작하는 부흥회에서 전할 말씀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한 시간쯤 후에 우리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한 신사분이 “어디에 가시냐?”고 물
독서는 크게 3단계로 나눈다. 교양독서, 학습독서, 그리고 연구독서다. 생애 주기별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나이를 먹고 독서력이 세워져 가는 정도에 따라 비율을 달리해 가며 진행된다.1단계, 교양독서다. 말 그대로 교양을 세우는 독서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독서요, 삶의 기초를 다지는 독서다. 성숙을 지향하는 미성숙한 상태의 독서인 동시에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 독서다. 어느 특정 기간의 독서 방법이 아닌 지속성을 생명으로 한 평생과정 독서다.교양독서의 출발은 관심이다. 의문을 풀어가고 빈 여백을 채워가는 것이 교양독서의 즐거
오래전 로마의 ‘카타콤’에 간 적이 있다.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지하 묘지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서 예배하던 곳이다. 관람을 위해 땅 아래로 내려가다가 창살 곁에서 자라나는 이름 모른 식물을 발견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은 자들이 누운 무덤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주신 놀라운 은혜를 보는 것 같았다.카타콤에서 예배했던 성도들의 신앙을 생각하다가, 최근에 정부에서 교회의 소모임을 금지했을 때 우리는 정부 시책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상황에 따라
소수의 사람과 집단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기가 있었다. 정보가 돈이고 권력이었으며, 명예의 마중물이었다. 제한된 정보만 대중에게 제공되었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말 그대로 ‘아는 것’이 힘인 시대였다.세월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다. 정보의 홍수시대를 넘어 ‘쓰나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예전이라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정보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사람들, 똑똑하다. 모르는 것이 없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가정주부, 나이 많은 노인들과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께서 참 좋은 말씀들을 하셨는데 청중 중에 몇 명이나 그 말씀을 이해하고, 삶 속에서 실천했을까? 그 중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원수’는 본래 나와 법정에서 대립하는 입장에 서 있는 ‘적대자’나 ‘대항자’를 의미한다. 누가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와 대립하는 적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나도 “예”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어려서부터 세상에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성공이라고 배우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