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오래전 로마의 ‘카타콤’에 간 적이 있다.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지하 묘지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서 예배하던 곳이다. 관람을 위해 땅 아래로 내려가다가 창살 곁에서 자라나는 이름 모른 식물을 발견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은 자들이 누운 무덤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주신 놀라운 은혜를 보는 것 같았다.

카타콤에서 예배했던 성도들의 신앙을 생각하다가, 최근에 정부에서 교회의 소모임을 금지했을 때 우리는 정부 시책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신앙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경제적 손해를 입거나,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는 말씀대로 순종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해치는 것만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악은 선에서 멀어지거나 돌아서는 상태를 말한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인 것처럼,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생명을 잃은 상태를 말한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악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으로 바로 죄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인의 길로 가는 것이 선이다.

시편 73편 28절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했는데 ‘가까이함’을 영어 성경에서는 ‘trust’(신뢰)와 ‘refuge’(피난처)로 번역하였다. 상황이 점점 어렵고 힘들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피난처로 삼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다.

구약의 유월절 양의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생명이 되었듯, 죽음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새로운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가져다준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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