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건국의 정신과 초심을 지키느냐, 잃어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고려는 왕건이 자주와 애민의 정신과 초심으로 시작했지만 훗날 권문세족들이 사리사욕만 부리다 망했다. 그래서 정도전이 민본의 정신과 초심으로 이성계를 앞세워 조선을 건국했다. 그러나 다시 사색당파와 붕당정치에 빠져 당리당략 싸움만 하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우리 총회도 마찬가지다. 1959년 WCC 가입문제를 놓고 신학의 순수성과 순혈성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분리를 감행했다. 여기엔 51인 신앙동지회와 정규오 목사 신학사상이 중심이 되
1. 일반계시의 불충분성“본성의 빛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사역은 사람이 핑계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선, 지혜, 권능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충분히 줄 수 없다.”(1.1)하나님은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창 1:27) ‘생령’이 되게 하셨다(창 2:7). 칼빈이 말했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 ‘종교의 씨앗’, ‘양심’이 부여되었다. 이를 ‘본성의 빛’이라고 한다.모든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롬 1:19). ‘양심
1.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표준문서 수립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신도게요서)는 선지자와 사도의 가르침, 어거스틴, 칼빈의 맥을 잇는, 오직 성경에 속한 것(of the Bible)만 성경적(Biblical)이라고 믿는 참 신학과 참 신앙의 최고 결정체이다.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2년부터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차례 회의와 수많은 소위원회로 모였다. 121명의 영국국교회의 청교도 목사들과 약간 명의 회중교회와 감독교회의 파송자들, 3명의 에라스티안(Erasti
선한 사마리아인 실천과 주님 앞 마리아의 균형 유의하라 누가복음 15장에는 율법사와 주님의 대화가 있다. 그 대화에서 율법을 무엇이라 읽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율법사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읽는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실천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던지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 등장한다.누가 이웃이냐고? 질문이 틀렸다대답의 핵심은 네 생각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은 비유 속에 대
‘선하고 온전한 뜻’을 현실서 구현해가는 ‘분별’ 필요하다 현 상황에 대해 글을 쓸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사회의 좌우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경제체제 뿐 아니라 북핵 문제, 미중일 등 주변국 관계, 동성애와 같은 젠더 문제 등이 복잡하게 엉켜있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기에 경제체제만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축소한다 하더라도 기독교를 결코 어느 한 체제와 간단히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고아와 과부에 관심을 가질 때조차 기독교는 해당 이데올로기와 같은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일
치우치지 않는 눈으로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정화하자 지난 글에서 ‘타락’에 대해 일부 언급이 있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출현하지만 그 고상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결코 목표한 세상을 가져오지 못하는 데에는 ‘타락’이라는 문제가 놓여있다. 사람들은 인간성의 부패라는 이 타락의 문제를 무시하고 그 이상에 낙관적으로 매달려 열광하지만, 그들이 열광하는 그 이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타락은 자본주의도 타락시키지만 사회주의도 타락시켰다. 정치 분야에서 타락은 심각하여 뻔한 거짓말과 말 뒤집기, 명분 가로채기, 중상모략과 선동
‘인간의 타락’을 경계하며 ‘구속’의 은혜로 새롭게 하라사람의 부패는 그 어떤 이상적 이데올로기도 좌절시켜 … 우상이 된 제도는 결코 구원이 될 수 없어지난 글에서 필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기본 틀인 창조-타락-구속 중 ‘창조’가 던지는 함의를 살펴보았다. 창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로 소유와 성취에 있어 겸손하게 한다. 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창조적인 본성이 본원적임을 권위 있게 선포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갈등 중인 두 이데올로기가 각각 ‘인간에 관한 진리’의 한 부분을 붙들고 있음을
격돌하는 세상 치유하는 성경적 기준은 ‘창조-타락-구속’ 지난 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국 목적이 그곳에 남다른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음을 보았다. 인류에게 잃어버린 복을 회복시켜 주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에서 사는 삶을 통해 더욱 세상에 알려질 예정이었다.(창18:19) 그런 점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들의 가장 큰 책임은 ‘다름’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 또한, 원하던 원하지 않던, 온통 비신자로 둘러싸인 낯선 정치 공간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있다. 거기서도 우리의 가장 중요
그리스도인의 중요 책무는 ‘다름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 정치로 나라 전체가 혼란하다. 너무나 혼란해서 모두들 우왕좌왕하고 있다. 나라가 얼마나 쪼개져 있는지, 어디서든 말 한 마디하기도 조심스럽다. 교회의 회중도 둘로 나뉘어 있어서 목사가 현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면 어느 쪽에서든 곧바로 반발한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설교는 너무 위험하다.하지만 사회가 이렇게 요동치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국’만 설교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와도 연관 되지 않는 주제’를 ‘아무와도 연관되지 않는 방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성실한 성경연구와 간절한 기도생활이 더 강화돼야 한다1. 들어가는 말필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무엇보다도 영미에서 일어난 청교도들의 대각성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세기 초엽부터 목회자들이 부패와 퇴조의 길을 점점 치닫고 있는 이유는 목회자 본연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교권욕심과 세속적 물욕과 명예욕에 매몰되어가기 때문이다.이제, 한국교회가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회복하려면, 목회자로서 소명의식 및 올바른 교회관을 회복하고, 성실한 말씀준비와 더불어 간절한 기도생활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즉 1907년 대각성운동처럼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령의 기치 높이 세우자 대학을 영어로 유니버시티(university)라고 한다. 이 단어는 유니티(unity)와 디버서티(diversity)가 결합하여 생긴 단어라고 한다. 이 말의 어원보다는 실제로 서구의 대학은 원래 신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학문들이 일체성을 이루어 시작했다.미국의 최고 명문 하버드 대학은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가 신학도 배출을 위해 기부한 재산의 반을 기반으로 1636년 매사추세츠 주에 세웠다. 그러다가 의과대학이 1782년, 법과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라‘복음은 율법의 약속 확인하고 실현한다’고 가르쳐 … 율법의 근본정신 사랑이 넘쳐나게 해야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성도가 신앙생활을 균형 있게 하도록 도와주는 척도가 된다. 초대 영지주의는 율법과 복음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호분리관계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율법과 복음은 구별되나 그 둘이 상호분리 관계라고 말하지 않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복음은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을 확인하고 실현했으며 ‘
최근 한국교회가 예배의 본질을 잃고 ‘탈성경적 예배’를 따르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개혁주의 신학의 예배가 이미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자질도 거론되고 있다. 말씀을 전할 때 영적으로 무장을 갖추지 않은 채 강론을 선언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자들도 많다. 신학교에서는 당연히 지영육을 제대로 교육하여 훌륭한 목회자를 양성하는게 목적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다시 개혁주의 신학은 논한다’는 주제로 재점검 하면서 신학자와 전문 목회자 5명의 글을 연속으로 싣는다.
성경적 설교는 본문에 근거, 삶의 변화 끌어내야 한다“오빠의 죽음을 앞에 놓고 아픔을 겪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부모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졌을 오빠가 죽는다는 것은 한 가정이 무너지는 일이나 마찬가집니다. 두 누이는 급하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주님,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습니다, 도와주세요.” 예수님은 평소에 나사로를 참 사랑하셨고, 두 누이와 나사로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병이 들면 의사를 불러야
진정한 행복 예수를 만나 위대한 변화 시작합시다삭게오 이야기를 통해 전할 수 있는 설교의 주제는 많습니다.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난 삭게오의 열정,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했지만 얻을 수 없는 절망, 재물을 포기함으로 하늘을 얻는 위대한 결단 등 많은 주제가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다루든 삭게오 이야기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부분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입니다. 삭게오의 인생 스토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킵니다. 예수님 없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해도 결국 외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