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마음으로 성경 대하며 말씀선포 철저히 준비해야 … 올바른 예배로 지속적 경건 도모하라

성실한 성경연구와 간절한 기도생활이 더 강화돼야 한다


1. 들어가는 말

조 봉 근 교수 (광신대학교, 조직신학)
조 봉 근 교수 (광신대학교, 조직신학)

필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무엇보다도 영미에서 일어난 청교도들의 대각성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세기 초엽부터 목회자들이 부패와 퇴조의 길을 점점 치닫고 있는 이유는 목회자 본연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교권욕심과 세속적 물욕과 명예욕에 매몰되어가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회복하려면, 목회자로서 소명의식 및 올바른 교회관을 회복하고, 성실한 말씀준비와 더불어 간절한 기도생활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즉 1907년 대각성운동처럼 목회자의 성실한 성경연구와 간절한 기도생활이 다시 회복(回復)되고, 더 강화(强化)돼야 할 것이다.

2. 목회자의 소명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표현한다. 성경이 사람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증거하기 때문에, 외적 소명은 사람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은혜와 성령의 역사 없이는 효력을 가질 수 없다. 성경이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외적 소명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을 효과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고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은 이것을 효력있는 소명이라고 표현한다. 이 효력있는 소명은 주권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 혹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부른다. 목회자가 이러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위선의 탈을 쓴 삯꾼 목회자임에 틀림없다.

3. 목회자의 자질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후보생으로서 합당한 지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학교육이다. 따라서 신학생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것은 마치 군인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소홀히 하는 것과 같다. 설교는 영적 준비와 무장을 성실히 수행한 결과로 빚어내는 영적 예술이다. 요컨대, 설교자 자신이 본문말씀을 깨달아 심령에 불이 타오르지 않고, 회중에게 무작정 전달하는 것은 성령님을 속이는 가식이나 허풍이 된다. 그래서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말씀선포에 주력해야 한다. 말씀준비 시에는 세 가지 측면을 숙고할 수 있다.

먼저, 본문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기도가 선행돼야 한다. 다음에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석을 하려고 늘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적용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설교자 자신이 정직하게 그 말씀대로 살려고 전심전력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회중들은 배신감을 느끼거나 낙심하게 된다. 결국 그렇지 못한 설교는 긍정적인 능력이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4. 목회자의 선포
청교도들은 말씀과 성령이 함께 동행하는 원리를 언제나 추구했다. 경건훈련은 성경자체이며, 성경의 요약이 바로 경건한 신경과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들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자체가 신적인 사역이라고 믿어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즉,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임재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선포자는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갖춤과 동시에 대언자의 권위 역시 망각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그 목적은 그 말씀을 올바로 전파하여 구원의 복음에서 떠난 사람들을 ‘하나님의 면전’(Coram Deo)에 서게 하는 것이며, 선포되어진 말씀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목회자는 말씀을 경청하는 회중 모두에게, 예배 중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神前意識)을 철저히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선포자에게는 두 음성이 필요한데, 첫째는 신실한 양떼들을 초청하는 음성이요, 둘째는 악한 이리떼를 쫓는 음성이다. 말씀선포자는 권위있는 표현과 더불어 온유함을 겸비해야 하고, 동시에 선지자적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만일 나태하고 타락한 중직자들이 듣기 좋게 은혜롭게 설교하라면서, 잘못을 전혀 회개하지 않고, 그냥 수양(修養)삼아 듣는다고, 이에 타협하여 인본주의적 세속설교를 즐긴다면, 바로 이것이 탈선이다.

5. 목회자의 영적 무장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라고 간청하다가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책망과 더불어,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런데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므로 이적적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요, 둘째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즉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뜻이다. 심각하게 악령이 들린 사람은 우리 정상인들처럼 자제력이 없고, 아주 불행한 영적 상황 속에 빠져 있다.(막 9:22)

예수님께서 보실 때, 제자들은 개인적으로 남이 모르는 은밀한 기도, 밀실기도, 특별히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한적한 시간에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깊은 기도생활이 부족했다는 의미이다. 능력이 따르는 기도생활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영적 교제의 시간이 필요하다.

6. 목회자의 성경관
목회자의 성경관은 항해하는 선박의 운전대와 같다. 목회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떨며 아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목회자가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학술적인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기술도 아니며, 교의학적 전제(前提)에 의하여 얻어지는 통찰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전적인 은사이다.

즉, 성령에 의하여 조명받은 자에게 있어서, 영감(靈感)과 조명(照明)하심은 서로 상관관계의 순간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써 이 사실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의 순정성(Authenticity)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입증(立證)되고, 그 의미에 대한 적절한 해석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서만 가능하다. 성령의 ‘내적 증거’(內的 證據)는 다름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먼저 기도하면서 본문을 여러 차례 깊이 묵상해야 한다. 목회자의 강단은 그의 인격과 신학을 총체적으로 적용하는 거룩한 무대이다. 그런데 목회자의 인격은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말씀 앞에서 늘 두려워해야 한다.(고전 2:3~5, 벧후 3:16) 왜냐하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1)

7. 목회자의 교회관
교회는 역사적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로 구성되며 그들로 구성된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이다. 특히 교회는 공동적 신앙고백과 예배, 성례, 그리고 외적 조직 등에서 그 유형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유형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회중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단어는 ‘에클레시아’()로서 ‘불러낸 무리’라는 뜻으로 신약성경에서 민회나 세속적 모임을 가리키기도 했으나(행 19:39, 41),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지교회의 목회자와 당회는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성실히 확인해야 한다. 만일 지교회가 이 기본적 의무에 성실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흐려지고 말 것이다. 교회 부패의 발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또 비록 교회에 직분이나 회의 등의 조직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교회에 본질적이지 않고 부수적면일 뿐이다.

8. 목회자의 은사관
지체가 여럿이듯이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은 서로 다른 은사를 나누어서 받는다. 이것을 은사들의 상이분배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반드시 하나의 은사만을 받는다는 원칙은 없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두 말할 필요 없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영적 은사들은 무엇인가? 성삼위 하나님께서 먼저 성령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의 직임과 사역을 수행하라고 주시는 각양의 서로 다른 은사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일반적 재능과 구별이 된다(롬 12:4~8, 고전 12:4~11, 27~31, 엡 4:11~12, 벧전 4:10).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이적적 은사들, 즉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다.

물론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자의 삶이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성령충만한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롬 8:14, 엡 4:30, 5:18) 그러므로 목회자는 영적 은사들을 가르칠 때, 즉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勸慰)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기도하는 일(롬 12:6~8)을 균형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방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로서의 은사가 아니라, 기도로서의 은사(고전 14:14~15)다.

9. 나가는 말
위에서 살펴 본대로 첫째, 목회자는 말씀선포(교리)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성경을 대할 때 두려운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둘째, 목회자는 기도가 살아있는 경건의 표현이므로 솔선수범해서 기도생활에 주력해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경건생활을 체질화하지 않으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성경은 우리가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친다.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방법은 올바른 예배이며, 예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경건을 도모할 수 있다.

만약 누구든지 예배드리는 것을 등한시 하면, 그의 삶은 결국 경건에서 멀어진다. 한국교회는 점점 모이기에 힘쓰지 않고,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저녁예배를 빼먹고 소홀히 여기는 현상을 보인다. 목회서신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딤전 4:8)고 증거한다. 또 바울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 3:16)라고 외친다. 바람직한 목회는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경건생활에 주력하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딤전 4:5)를 장려하는 목회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