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다시 개혁주의 신학을 논한다] ②율법과 복음의 관계
[특별기고/ 다시 개혁주의 신학을 논한다] ②율법과 복음의 관계
  • 기독신문
  • 승인 2019.09.2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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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라
‘복음은 율법의 약속 확인하고 실현한다’고 가르쳐 … 율법의 근본정신 사랑이 넘쳐나게 해야

김상현 목사 (목장교회·칼빈대 겸임교수)
김상현 목사 (목장교회·칼빈대 겸임교수)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성도가 신앙생활을 균형 있게 하도록 도와주는 척도가 된다. 초대 영지주의는 율법과 복음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호분리관계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율법과 복음은 구별되나 그 둘이 상호분리 관계라고 말하지 않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복음은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을 확인하고 실현했으며 ‘그림자’에 ‘몸’을 부여했다고 말했다.(기독교강요 2장 9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되지만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증거를 받은 것(롬 3:21)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에 율법과 복음의 이해는 중요한 영적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율법과 복음의 연관성을 간과하면 율법 폐기론자가 되거나 율법주의(Legalism)로 흐르기 쉽다.

이신칭의 ‘신앙의 뿌리’

종교개혁 이후에 이신칭의 사상은 우리 신앙에 뿌리를 깊게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여기에 우리의 행위는 어떠한 도구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어선 이 시점에 다시 행위중심으로 가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다. 이것은 학계에서 혹은 강단에서 이신칭의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 한국교회에 행위가 부족하다고 가르치는 것들이다. 결국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면서 그 율법의 행위로 사랑보다는 정죄와 판단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지키게 하고, 그 율법의 잣대로 정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총회적으로 중요한 이 시점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살펴보며 우리 자신들이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먼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율법은 히브리어로 ‘토라’ 70인 역에서는 ‘노모스’라고 하였고 율법은 일반적으로 모세오경을 가르치나 더 집약적으로는 십계명을 뜻한다. 광의로는 율법, 예언, 성문을 다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이르기도 한다. 또한 율법의 분류는 도덕법(출20:1-26)으로 십계명과, 재판법(출 21:1~24)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민법으로 모든 백성의 재판에 사용되는 법이며, 의식법(출 24~34장)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들 수 있다. 바울은 율법를 사용할 때 이렇게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할 때도 있지만(고전 14:9, 21, 34; 갈 4:21), 또한 법과 규범을 의미하는 경우(롬 7:21-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도 있다.

그러면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신약성경에서 복음,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혹은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의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공관복음에서 유앙겔리온은 교회에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사건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에게 유앙겔리온은 그 신학의 중심 사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로서 성도를 구원하신 역사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구원, 중생과 죄사함, 이 모든 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였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율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했다. 루터는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율법의 이중적 사용을 말하였는데, 시민적 사용(정치적 용법)은 사악한 자를 통제하고 시민적 의를 유지하고 세상에서 복음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반면에 율법의 신학적 용법은 죄인들을 두렵게 하고 정죄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을 구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루터에게 율법의 주된 기능은 신학적 용법이다. 루터는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을 강조하였으며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서로 조화보다는 대립과 긴장의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구원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즉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얻는데,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누구든지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복음 즉 구원의 길을 거부하는 무서운 죄를 짓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누구든지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자신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만을 신뢰할 때,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하신 자신의 의를 줌으로써, 그를 율법으로부터 복음에로, 죄부터 의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와 다르게 율법의 긍정적인 기능을 강조하였다. 칼빈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율법주의에 관하여는 루터와 칼빈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구원 즉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을 말할 때 칼빈은 루터와 다른 견해를 말하는데 그것은 율법의 제 1, 2기능 외에 천국백성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제 3의 기능을 말한 것이다. 칼빈은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했다. 율법의 기능 중에 의식적인 기능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율법의 도덕적인 기능은 성도들에게 여전히 삶의 규범으로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성경에서 성도는 율법의 저주와 요구에서 해방되었지만(롬 8:2) 율법을 주신 원래 목적 즉 그 법정신까지 폐기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롬 7:7) 바울은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롬 3:20, 롬 7:7) 또한 율법은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생에 비유하고 있다.(갈 3:24) 즉 율법은 그 자체는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서 오직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한다고 한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비판하고 율법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오직 유대 기독교인들의 주장 즉 예수 믿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할례를 포함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라고 까지 했고 그들을 거짓 교사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주일을 지킨다

예수님도 율법에 대하여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의 주체가 되셔서 그 율법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율법은 ‘그림자’요 예수님은 ‘몸’이시다.(골 2:17)예수님은 몸소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셨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말하였다.(롬 3:31)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폐기 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지킨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계명이 폐기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성도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지킨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두려움과 금지의 소극적인 개념으로 지켰다면 신약 성도들은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기쁨과 감사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지킨다. 신약성도에게 율법은 구원받기 위한 어떤 의무라기보다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칼빈은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본래의 율법의 용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의 용도는 죄가 들어옴으로 우발적으로 생긴 것으로 보았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바로 율법은 복음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음 아래서 율법은 정죄의 기능이 아닌 사랑으로 해석이 된다. 복음 아래서 율법은 본래 정신인 사랑을 되찾는다.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분하였다.(마 22:37~40)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신칭의를 주장하면서 율법주의에 얼마나 쉽게 빠지는가? 얼마나 쉽게 어떤 규례와 범주를 정해놓고 그것이 마치 말씀이라도 된 양 그것을 신봉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율법정신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착각이다. 율법은 처음부터 사랑으로 주어졌다. 신앙생활은 사랑이며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정죄하고 극한 대립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율법은 사랑으로 주어졌다

현재 총회와 총신의 상황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처럼 고소 고발과 데모가 많은 때가 있었는가 싶다. 총신대 문제도 더 기도하고 인내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므로 총회를 세우려는 마음 보다는 정죄와 고소 고발이 난무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이 부재함을 느낀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절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하셨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복음의 본체이신 사랑의 주님을 묵상하자. 종교 개혁의 5대 외침(fivesolas)인 오직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Soli Deo Gloria) 그 사랑으로 우리 교회와 총회와 총신이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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