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 정치공간은 믿음의 걸음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가나안’ … 진영과 이데올로기 정화에 힘써야

 그리스도인의 중요 책무는 ‘다름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
 

정치로 나라 전체가 혼란하다. 너무나 혼란해서 모두들 우왕좌왕하고 있다. 나라가 얼마나 쪼개져 있는지, 어디서든 말 한 마디하기도 조심스럽다. 교회의 회중도 둘로 나뉘어 있어서 목사가 현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면 어느 쪽에서든 곧바로 반발한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설교는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사회가 이렇게 요동치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국’만 설교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와도 연관 되지 않는 주제’를 ‘아무와도 연관되지 않는 방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설교하는 게 가능할까? 그래도 되는 걸까? 필자는 지난해부터 이런 의문으로 고심했다. 정치를 주제로 한 설교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성도들에게 성경의 원리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 나라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뉘어 극도로 갈등하던 지난 9월 8일부터 평촌새순교회에서 6주 동안 ‘이렇게 혼란한 때에 길은 어디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관련기사
‘이념 절대화하지 말고 성경따라 화평과 평화 일구라’ (기독신문 2217호) 참조.

이 글은 설교의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 5회에 걸쳐 이념이 아닌 성경의 기준을 따라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 보도록 하겠다.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해 ‘정치의 영역’을 설교하려는 목회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사실 아무 말도 안하면 너무 쉽고 편하다. 그냥 기도하자고 하면 된다. 정치는 우리와 상관없는 더러운 영역이라고 비난하면 끝이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 하면 모든 게 너무 어렵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연구도 하고, 기도도 하고, 고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 문제와 관련한 설교는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어느 한쪽, 혹은 양쪽에게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양비론을 택하는 것은 비겁하다. 양측을 비난만 하면서 ‘그럼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
온 나라가 정치로 혼란한 상황에서 목사는 양비론에 그치지 않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말씀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이 주어져 있기에 거기서 성경적 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첫 이야기를 여호수아서 1장 1~9절을 통해서 열어본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지도자 모세가 죽은 상황에서 그들을 그 땅으로 이끌어 들어가야 하는 여호수아! 그가 느꼈을 부담감은 얼마나 컸을까? ‘나는 모세가 아닌데 잘 할 수 있을까? 광야에서처럼 저들은 대들고 다툴 것인데, 그 땅을 정복하고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마 밤새 잠을 설쳤을 것이다.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상황 자체는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다.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릴 안식과 관련하여 읽힐 수도 있고, 오늘 우리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후자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 들여보내는 근본 목적을 바로 아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다름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들여보낸 것은 단지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 가나안과는 ‘전혀 다른 사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거기서 그 공동체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나라 분양을 위한 모델하우스 역할이다. 사람들이 그 공동체와 거기 담긴 전혀 다른 삶, 전혀 다른 관계를 보고, 그것이 그들이 믿는 신으로 인해 일어난 차이임을 알아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 하나님나라를 사게 하기 위해 세워진 모델하우스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기능은 그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의 사회가 되기 원하시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종과 자유자, 남자와 여자 등의 관계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두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공동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다.

그렇다면 그 땅에 들어가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임은 뭘까? ‘다름’이다. 주변의 나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지금까지의 가나안과는 전혀 다른 사회’를 세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늘도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세상 속에서 남다른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것 또한 다름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 원리를 창세기(18:19)에서 이미 분명하게 해 두셨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선교)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스라엘·오늘의 교회)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 즉 공의와 정의를 행할 때 그것을 통해 성취되게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은 모든 일에 있어서 남다름이다. 여기에는 정치도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정치의 공간에서 남다른가? 오늘날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구별되고 있는가?

이념을 신뢰하는 우상숭배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나뉜다. 그 한쪽에 무관심이 있다. 그냥 무관심한 사람도 있지만, 무관심해야 하는 줄로 아는 이들도 있다. 정치는 그리스도인과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점에서 그렇다. 또 정치는 우리 삶의 모든 것과 관련되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 누구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무관심해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무관심이라는 정치적 견해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또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특별히 경건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안전과 복지가 정치에 의해 좌우되는데, 그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이웃의 삶에 무관심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무관심의 반대쪽엔 정치 과잉이 있다. 정치 과잉은 정치에 과도한 기대를 거는 데서 나온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정치적으로 더욱 과민하고 극단적이게 된다. 그것이 지나치면 우상숭배의 성격을 띤다. 하나님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극단적이 된다.

오늘 우리의 정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 참여’ 자체가 아니다. 정치의 공간에만 들어가면 세상 사람과 꼭 같아진다는 것이 문제다. 똑같이 난폭하고 똑같이 극단적이며 비이성적이 되는 것이다. 말씀은 온 데 간 데 없고, 너무나 쉽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린다. 그저 그 진영의 사람이 되어 자신의 진영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다른 진영의 잘못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켠다. 나와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견해가 다르고 접근방식이 다를 뿐인데, 얼토당토않은 프레임을 갖다 씌운다. ‘틀딱’ ‘빨갱이’ ‘토착 왜구’ ‘닭그네’ 등과 같은 모욕적인 호칭을 상대진영의 사람들에게 갖다 붙이기도 한다.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생각도 않고 말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순간 상대에 대해 이해할 마음이나 연민은 사라진다. 단지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 대화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정치의 공간에 들어서면 기독교인들조차 그들이 하는 말을 너무 쉽게 받아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스도인,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신의 이웃이 자신과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배운 사람들 아닌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자들 아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았다고 고백하는 자들 아닌가? 그런데 왜 정치의 공간에 들어서면 그토록 쉽게 자신을 잊어버리는가?

그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기보다 이데올로기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 것이다.

정치공간에서도 ‘다름의 존재’로
이런 정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이다. 기독교인은 정치의 공간에서도 달라야 한다. 오늘의 상황에서 정치공간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걸음으로 밟고 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가나안’이다. 말씀을 의지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밟아야 할 땅이다. 마치 고대의 이스라엘이 수많은 불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다른 사회를 만들어야 했듯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불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공간이다.

우리는 거기서 가나안의 풍습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가나안 7족속을 몰아내야 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치 풍토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수많은 잘못된 관행들과 양심 없는 내로남불, 건전한 토론을 불가능하게 양극단으로 몰아붙이는 프레임 전술 등을 몰아내야 한다. 우리는 한 진영에 속하여 상대 진영에 온갖 것을 뒤집어씌우기보다, 자기가 지지하는 진영과 이데올로기를 정화해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기보다 그 이데올로기를 구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치를 만날 때 그것에 의해 오염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정화하는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술을 정화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빛으로, 소금으로 부름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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