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타락’을 경계하며 ‘구속’의 은혜로 새롭게 하라
사람의 부패는 그 어떤 이상적 이데올로기도 좌절시켜 … 우상이 된 제도는 결코 구원이 될 수 없어

고성제 목사(평촌새순교회)
고성제 목사(평촌새순교회)

지난 글에서 필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기본 틀인 창조-타락-구속 중 ‘창조’가 던지는 함의를 살펴보았다. 창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로 소유와 성취에 있어 겸손하게 한다. 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창조적인 본성이 본원적임을 권위 있게 선포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갈등 중인 두 이데올로기가 각각 ‘인간에 관한 진리’의 한 부분을 붙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갈등이 쉽사리 끝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한 이데올로기의 실험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다시 역사의 무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둘 사이의 갈등은 결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쓸어버리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이다.

현 갈등 상황에 대한 ‘타락’의 함의

그렇다면 ‘타락’이 현 상황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난 글에서 필자는 선악과의 의미를 오늘의 갈등상황과 관련시켜 보았다. 그것은 동산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리되, 항상 자신과 다른 시각이 존재함을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그 시각은 지으신 만물을 향해 두루 따뜻한 하나님의 시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심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리되 항상 그 분의 시각을 기억함으로써, 자신에게 좋은 느낌과 만족스러움 여부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게 하지 않도록 요청하신 것이다. 그 ‘두루 따뜻한 시선’은 훗날 율법 속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공의와 정의의) 말씀으로 나타나며, 산상수훈에서는 ‘남이 너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대로 네가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요청을 거부하고 자신의 느낌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만다. 이후 인간의 판단과 선택은 누군가에게 무관심, 무정함, 불의와 고통이 되게 된 것이다. 결국 죄의 본질은 삶의 기준으로서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그 결과로서 주변과 이웃에 대한 공감의 부재다. 그저 내 느낌과 내 생각에 좋은대로 주장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이 죄의 본질이다.

우상숭배:메시아가 된 이데올로기

타락의 이런 양상은 우리의 삶의 전반에 왜곡을 가져오는데, 정치의 공간에서는 더욱 심하다. 정치야말로 (소수의 그렇지 않은 분들이 있어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드러내놓고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거짓말, 양심 없는 말 뒤집기, 중상모략과 선전선동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공간이다.

정치의 세계에 나타나는 각종 타락의 이면에는 우상숭배가 있다. 여기서 우상 숭배는 단지 어떤 목상이나 석상 앞에 미신적으로 복을 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아닌 것에 궁극적인 의미와 희망, 자랑과 안전감 등을 기대하며 의지하는 것이다. 돈도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구매력을 가진 돈은 그 자체로는 참 좋은 것일 수 있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얼마간의 안전과 편리도 제공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자칫 돈이 돈 이상이 될 수 있다.

단지 ‘좋은 것’을 넘어, 나의 안전에 대해 무한 책임지고,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 자신감을 주는 ‘유사 하나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돈은 ‘좋은 것’을 넘어 ‘거의 신’이 된다. 돈이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이 되면, 모든 중요한 것들이 다 거기 달린 것처럼 느껴져, 금전적 손실 앞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불안해지며 여러 극단적 범죄가 발생하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 공간은 자칫 많은 사람들이 온갖 우상을 섬기는 만신전(Pantheon)이 된다. 군중들은 자신들의 한(恨)을 우상삼아 그것만 풀면 행복할 것처럼 행동한다. 정당인들은 정권이라는 우상에, 국회의원들은 의원직이라는 우상에 인생의 의미를 건다. 그 우상은 너무나 강하게 사람들을 장악하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온 생애와 시간을 드려 그 앞에 산제사(Living Sacrifice)를 드린다. 국회 의사당은 민의를 모아 국정을 의논하는 신성한 곳이지만, 다른 한편 이데올로기를 섬기는 사람들과, 의원직에 삶의 의미를 건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상 앞에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신전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메시아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의지한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이 사회에 구원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가 메시아다. 그들은 시장이 그들을 구원하리라 믿고 있다. 시장에서의 경쟁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가져와 발전과 함께 가장 효율적이고 좋은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아주 상징적이게도,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오래 전 바로 이 점을 아주 종교적으로 표현했다. 모든 걸 시장에 맡겨두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조정되어 최선(‘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품뿐 아니라 노동도 그렇다. 노동도 시장에 맡겨 두기만 해도 수요와 공급이 조절되어, 가장 합당한 노동 가격 곧 임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은 누가 좋아할까? 엘리트들이 좋아할 것이다.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무언가가 주어진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건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서 이렇게 말한다. “시장에 의해 조절되기만 하면 되나? 그 과정이 사람이 죽는 과정인데… 자살해서 노동의 공급이 줄고, 애 안 낳아서 줄어 균형을 이룬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본격화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밀려날 텐데 그 때도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에만 맡겨져야 하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함을 의미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자본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야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메시아는 사회주의다.

그렇게 나뉘어 세상은 서로를 비난한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한다. 역사상 사회주의는 실패로 끝났으며 그런 방식으로는 성공한 나라가 없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시장에 맡겨두니 이렇게 양극화가 심하게 되었지 않느냐, 이게 뭐냐! 자살률이 세계 1위 아니냐. 올해는 일가족 동반자살이 이렇게 늘지 않았냐! 도대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지 않느냐!’ 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 거꾸로 인가?

결국 어느 것이 맞을까? 70년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지만 공산주의에서는 그 거꾸로다.”(Under capitalism, man exploits man. Under communism, it’s just the opposite.)

무슨 말인가? 공산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수탈하는’ 자본주의와 비교해 볼 때 정확히 그 거꾸로라니… 자본주의와 달리 공산주의에서는 인간을 존중한다는 뜻인가? 갈브레이스 교수의 말은 진실을 알리는 기막힌 언어유희(word play)다. 그가 ‘공산주의에서는 그 거꾸로다’(It’s just the opposite)라고 한 것은 공산주의는 인간을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사람을 수탈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Man exploits man은 거꾸로 해도 Man exploits man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을 억압하느냐 아니면 저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억압하느냐 하는 점만 다를 뿐이라는 말이다.

결국 이데올로기로는 완전한 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보면 어떤가? 마치 특정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 정말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갈브레이드는 촌철살인의 말로 그 환상이 허구임을 적시했다.

성경:현실에 대한 가장 현실적 시선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 중 어느 쪽을 따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이상 사회는 오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그들 모두가 간과하는 한 가지,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체제나 시스템을 너무 신뢰한다. 그리고 인간성에 대해 너무 낙관적이다.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의 메커니즘과 기업을 너무 신뢰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주의자들은 대중과 노동자, 노조를 너무 신뢰한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 하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무슨 뜻인가?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상적인 이데올로기를 채택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 때문이다. 사람이 타락하면 에덴도 더이상 에덴이지 않듯이, 인간의 부패는 어떤 이상적인 제도도 좌절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 일정한 조절 기능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맡겨 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시장을 이상화하는 것이다. 분배에 신경을 쓰면 다들 양심적으로 일할 것 같지만 도리어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다. 그건 인간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이 있어야 모든 게 제대로 기능할까? ‘구속’이다. 마음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 필요하다.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설교하면 혹자는 목사가 왜 설교 시간에 경제학 강의를 하나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학 강의를 하는 게 아니다. 필자는 지금 성경이 우리의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성도들 중에는 성경은 신학일 뿐이고 현실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성경만큼 인간과 세상을 꿰뚫고 있는 것은 없음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말씀 안에서 답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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