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성경의 정치참여 원리와 설교하기 ② 그리스도인의 기준과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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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제 목사
  • 승인 2019.11.0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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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치지 않는 ‘다름’의 그리스도인에겐 ‘기준을 아는 것과 용기’가 필요 … 창조 통해 삶의 기본질서 배워

격돌하는 세상 치유하는 성경적 기준은 ‘창조-타락-구속’
 

지난 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국 목적이 그곳에 남다른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음을 보았다. 인류에게 잃어버린 복을 회복시켜 주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에서 사는 삶을 통해 더욱 세상에 알려질 예정이었다.(창18:19) 그런 점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들의 가장 큰 책임은 ‘다름’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 또한, 원하던 원하지 않던, 온통 비신자로 둘러싸인 낯선 정치 공간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있다. 거기서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다름’일 수밖에 없다.

치우치지 않을 기준인 말씀, 그리고 용기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고성제 목사 (평촌새순교회)

그렇다면 이 ‘다름’은 어디서 오는 걸까? 여호수아 1장 8절은 말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 형통하리라” 다름의 비밀은 ‘율법’에 있다. 깊은 묵상을 통해 율법이 우리의 인격 안에 깊이 젖어 들 때 우리에게서 ‘다름’이 배어나온다. 율법 안에 여호와의 도, 곧 그 분의 길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이것의 신약적 의미는 이것으로부터 한 번 더 묵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율법은 단지 ‘명령과 금지’의 리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오경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와 함께 타락 그리고 구원의 이야기 전체를 말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을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대한 감동적 이야기가 있다. 조상들의 절망적 상태와,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찾아와 희망되어 주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감당해 주셨는지가 나와 있다. 그것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심령이 그 사랑에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명령하는 것을 느낀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도다!”라고 했다. 그 “사랑의 강권”은 앞으로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율법은 한편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줌으로 우리를 다르게 하고, 다른 한편 모든 것의 기준이 될 진리를 가르침으로 우리를 치우치지 않게 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때 이미 좌파나 우파를 아셨다는 말일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닐 거다. 하지만 그 말이 분명 전제하는 것은 ‘기준은 있다’는 것이다. 기준이 없다면 치우치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기준을 아는 것과 용기다! 기준을 모르면 치우치게 되지만 용기가 없으면 좌우로 피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시각, 창조-타락-구속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라는 기준이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떤 상황일까? 세상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을까? 경험일까? 그렇다면 누구의 경험이 기준인가? 노동자의 경험인가? 경영자의 경험인가? 이데올로기가 기준이라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인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 체제가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조적 모험심을 장려한다며 지지한다. 하지만 그 체제 안에서 실패한 개인과 기업들은 자본주의 속에서 소외된 채 희망 없이 죽어간다. 그래서 그들은 그 체제를 혐오한다. 반면 사회주의는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더 온정적 태도를 표방하기에 그런 이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로운 소유와 창조적인 활동을 제한해 전체적으로 활기가 떨어지기 쉬우므로 다른 이들로부터 배척받는다.

이 둘은 팽팽하게 대립하며, 어느 한쪽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각 진영은 자신들이 인간에 관해 ‘포기할 수 없는 진실’을 붙들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어느 일면 맞는 생각이다. 각 진영은 인간에 대한 진실의 한 일면, 곧 ‘인간의 창조적 본성과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붙잡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들이 그것을 주장하면서도 근거를 확실하게 댈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을 존엄하다고 하지만 왜 존엄한지, 또 인간의 자유와 창조적 본능을 억압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왜 그것이 그러한지 근거를 댈 수 없다.

본질적으로 진화론적 세계관으로는 인간 존재의 특성을 깊이 관찰은 할 수 있어도, 그 근본 이유와 의미 등 본연의 진실에 대해 권위 있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각 진영은 옳음의 근거를 그저 자신의 신념이나 지지 세력의 숫자에 둔다. 광장에 모인 숫자, 목소리의 크기가 그들의 자신감을 제고한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위해 세력을 조직화하기도 하고, ‘댓글부대’나 ‘◯사모’나 ‘◯빠’를 운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안정된 시각을 제공해 주는 걸까?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기본적 시각은 ‘창조-타락-구속’이다. 이 틀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 대해 가장 실제적인 이해를 갖게 된다.

‘창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삶의 기본질서를 배운다. 그 질서가 우리로 각 이데올로기의 핵심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하고, 그 중 제거할 것을 제거하더라도 남아야 할 것이 무엇이지를 이해하게 한다. 우리의 어려움은 늘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는 데서 가중된다. 이데올로기를 ‘전부 아니면 전무’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교회에서마저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싸움이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의 ‘창조’ 원리를 바로 이해하면 교회 내의 긴장도 크게 완화될 것이다.

‘타락’을 통해서 우리는 각 이데올로기들이 그 높은 이상(理想)에도 불구하고  왜 결국 좌절스런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이상(理想)이 어떻게 쉽게 오염되는지를 이해하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자제하게 된다. 그리고 ‘구속’은 우리에게 왜 그리스도가 답인지, 왜 그 분 안에서만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이 되는지를 보게 한다. 주님이 모든 것을 온전케 할 때까지,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소금과 빛’이 되도록 부름 받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갈등하는 사회를 향한 창조의 함의
이제 각 부분을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창조는 이데올로기가 격돌하는 오늘을 치유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 걸까?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 분의 선물이라는 시각을 제공해 줌으로써 도움을 준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셨으며, 우리가 누리는 것 중에 인간 자신이 만든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인간의 존재 자체도 그 분의 선물이며, 생명, 재능과 능력도 마찬가지다. 이 사실은 소유와 성취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 소유하되 나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소유하게 한다. 성취에 대해서도, 그 과정은 즐기되 결과물은 주님의 선물과 은혜로 기억하게 한다.(신8:18) 결국 누림에 있어서도 너그럽고, 많은 성취를 이룬 자의 마음속에도 교만이 아닌 겸손이 자리하게 한다.

둘째, 창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엄 있게 가르쳐준다. 물론 세상도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장만 할 뿐 근거를 대지 못함에 비해 성경은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권위 있게 선포한다. 또 창조는 인간에게 자유와 창조적 본능이 주어져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 분께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거역할 수도 있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어라)”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이다.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이제 그는 지으신 분의 창조성을 따라 창의적으로 땅을 채워나가면 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 자유와 창조적 본능은 처음부터 인간의 특권임이 잘 나타난다.
동시에 창조 이야기는 그 자유가 아무 제한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거기에는 한 가지 제한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선악과로 나타났다. 선악과의 의미를 갈등하는 우리 사회와 관련하여 풀어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담! 이제부터 너는 자유야. 모든 것을 네 마음대로 누려도 좋아.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할게 있어! 그것은 네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거야. 중요한 것은 그 분에게는 너와는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이지! 너는 아무 것도 네 손으로 짓지 않았기에 네 관심은 자칫 네 자신이나 이제부터 네가 만들 것에만 있기 쉬워. 하지만 기억해! 너와는 다른 하나님의 시각이 있다는 것을! 그 분은 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지으신 분이야! 그렇기에 그 분은 너와 네 이웃, 그리고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해 두루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계시지. 그러니 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리되 그 분의 시각을 의식하면서 그것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해! 이제 선악과를 볼 때마다 기억해! 네 느낌이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조심해! 네게 얼마나 만족스러운지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도록!”

선악과의 의미가 이게 다일 수 없지만 이것을 중요하게 포함한다. 두루 따뜻한 하나님의 시각이 훗날 율법에서 이웃에 대한 바른 태도인 공의와 정의로 나타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공의는 사람을 겉모습에 따라 다르게 대하지 않는 것이고, 정의는 이웃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 공감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주님은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셨다. 그것은 모두를 향해 배려있는 마음이다.

인간성과 관련하여 이 땅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자유경제 체제가 부르짖는 기본 가치(존엄성, 자유, 창조적 본능)는 인간에 관해 창조 질서가 말하는 진실 중에 한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갈등은 쉽게 포기될 수 없는 싸움임을 알 수 있다. 이 갈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창조질서는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타락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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